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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16>경기 화성시 향남읍 구도심
오늘은 경기도 남부의 도시인 화성시로 간다. 21세기 초 한국의 현재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이곳에서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화성시라고 하면 많은 분들은 동탄 신도시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갈 곳은 내가 '확장 강남'이라 부르는 화성시 동쪽 끝의 동탄 신도시가 아니라, 화성시 서남부의 중심 도시인 향남읍 장짐리·평리·행정리 지역이다. 서해선 향남역이 2023년에 완공될 예정인데다가, 화성시 측에서는 신안산선을 이곳까지 확장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어서, 앞으로 뉴스에서 많이 듣게 될 곳이다.
동탄 신도시는 중·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층 아파트 단지를 위주로 하는 단일한 성격의 도시다. 이에 비해 향남읍은 백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구도심과 고층아파트 단지 위주의 신도시가 공존하고 있다. 내가 전국을 답사한 바로는, 후자가 한국 도시들의 일반적인 상황에 좀 더 가깝다.
또한 옛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향남읍 구도심에서는, OECD 기준에 따라 한국이 곧 진입하게 될 '다인종·다문화 국가'의 모습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서울 등의 대도시 핵심부에서 거주하는 시민들만 모를 뿐이지, 미등록 외국인까지 포함한다면 한국은 이미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되었음을 전국을 답사하면서 확인한다.
대도시 핵심부에 주거와 직장을 둔 정책 결정자와 언론인들은, "한국이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논쟁을 벌이고는 한다. 향남읍 구도심을 1분만 걸으면, 이런 논쟁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안다. 한국은 이미 '다인종·다문화 국가'다. 2021년의 한국 시민들은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당위가 아니라, 이미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된 한국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가 하는 팩트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향남읍의 현재 모습을 살피기 전에, 향남읍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행정구역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 간단히 살핀다.
향남읍은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하기 전까지는 향남면이었다. 광복과 6·25전쟁 직후의 지리적 정보를 많이 담고 있는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 경기도편에는 향남면의 연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원래 향남면은 오늘날 화성시의 동부에 해당하는 수원군의 남면이었다. 그러다가 식민지 초기인 1914년 3월 1일에 전국적인 군·면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같은 수원군의 공향면·남곡면 일부, 그리고 오늘날 화성시의 서부에 해당하는 남양군의 분향리면 일부가 통합되었다. 이때 공향면에서 '향', 남면에서 '남'을 따와 '향남'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향남읍 도심을 이루는 장짐리·평리·행정리의 현재사를 만들어낸 지난 100년간의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지금의 향남읍 서북쪽에 있던 팔탄면의 발안장이 1913년에 지금의 발안만세시장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 발안장이 있던 화성시 팔탄면에는 구장리(舊場里)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예전에 장터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번성하던 발안장의 모습을 이곳에서 찾기는 쉽지 않지만, 팔탄면의 단위농협인 팔탄농협의 본점이 이곳 구장리에 있어서, 이곳이 팔탄면의 중심지임을 짐작케 한다. 발안장이 이전한 것이 1913년이 아니라 그 이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여기서는 통설에 따라서 말씀드렸다.
팔탄면에 있던 발안장이 이웃한 향남면으로 옮겨간 것과 비슷한 사례가 경기도 안양시와 군포시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의 군포시라는 지명은 원래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에 있던 군포장(軍浦場)이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오늘날의 경부선 군포역 앞으로 옮겨온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안양과 군포를 잇는 구군포교(舊軍浦橋) 근처다. 타지에서 옮겨온 장터가 3·1운동을 내세우고, 다인종·다문화 국가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발안장과 군포장이 똑같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는 한강 유역의 자연·인문 지리를 크게 바꾸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자리하던 다산 정약용 집안의 거처도 이때 물에 잠겨서, 정약용의 책들 가운데 물에 젖은 흔적이 있는 것들을 박물관에서 종종 마주친다. 프랑스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진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서래마을도, 원래 좀 더 아래쪽의 한강 가에 있던 마을이 1925년 이후 물난리를 피해 언덕 위로 옮겨오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발안장이 팔탄면에서 향남면으로 옮겨온 이유는 아마도, 향남면이 교통 요충지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원군(화성군)과 남양군의 땅을 합쳐서 만들어진 향남읍은 두 군(郡)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상의 이점으로 인해 향남읍은, 옛 화성군의 동탄·오산·병점, 옛 남양군의 남양읍 및 송산면 사강리 등과 나란히 화성시의 3대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교통 요충지로서의 향남읍의 핵심은 구도심의 동북쪽 끝에 자리한 장점교차로부터 발안파출소에 이르는 3·1만세로의 한복판에 있던 발안버스터미널이었다. 현재 발안버스터미널 자리에는 오피스텔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그 옆에는 지방 도시의 버스터미널 옆에는 반드시 나란히 놓이는 택시 정류소 및 '발안터미널약국' 등의 시설이 도시화석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 택시 사무소의 출입구에는 타이어와 베트남어로 적힌 안내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지정 택시 이외에는 불법이니 이용하지 맙시다"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외국어로만 적혀 있고 한국어로는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다인종·다문화 국가' 한국을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존재인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의 2021년 현재를 증언한다.
향남읍 구도심으로 진입하는 옛 신작로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장짐교차로 서남쪽 일대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시설이 모여 있다.
첫 번째는 이 지역의 정신적 거점으로서 기능해온 발안성당이고, 두 번째는 성당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의사 최해붕 선생의 공적비이다. 식민지 시기부터 사망할 때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의술을 베푼 최해붕 선생을 기려 1982년에 세워진 공적비는, "2021년 화성시 외국인 주민 동아리 지원사업" 안내 플래카드에 가려져 있었다. 2021년 현재의 향남면 구도심에서 어떤 사람들이 잊히고, 어떤 사람들이 새로운 주민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느꼈다.
서울 방향에서 향남읍 구도심으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발안성당과 최해붕 선생 공적비 이외에 '수원 화성 오산 축산농협 발안지점' 건물이 있다. 농협·축협·신협 등의 건물은 구도심의 입구와 중심부가 어디인지를 가리키는 도시화석이다. 구도심의 북쪽에 자리한 축협 건물, 구도심의 남쪽에 자리한 발안농협과 화성우리신협 본점 건물은 향남읍 구도심의 지리적 범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발안농협 본점은 옛 발안장 남쪽에서 옛 창고 자리로 옮겨갔고, 본점 자리에는 NH농협은행이 들어서 있다.
여담이지만, 한국판 마이크로 크레딧(micro credit)이라고 할 신용협동조합은 가톨릭과 같은 종교 단체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화성시 서부 향남읍의 화성우리신협과 송산면의 화성제일신협이 각각 발안성당과 사강성당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향남읍 구도심 초입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시설은 발안 이슬람 사원과,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까리따스 이주민 지원센터이다. 발안성당에서 언덕을 내려와 옛 신작로로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네팔·필리핀·중화인민공화국 등 수많은 국적의 점포들 사이에, 이주민들을 정신적으로 지원하는 이들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대도시 바깥 지역을 답사할 때에는 그 지역에 '월드 마트' '할랄 마트' 등의 점포가 얼마나 존재하는가로 그 지역의 다인종·다문화 정도를 체크한다. 향남읍 구도심에는 이들 점포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서 있다. '한국이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대도시 핵심부 일부 시민들의 논의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향남읍의 신작로를 걸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향남읍 구도심이 다인종?다문화 지역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이 향남읍 일대에서 서울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단은 향남읍 구도심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간 지역에 있지만, 서울로 향하는 버스터미널이 있는 지역에 이들이 모이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종교시설이 들어섰을 것이다. 화성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 북부의 포천시의 경우도, 포천의 중심지인 포천시청 쪽이 아니라 서울에 가까운 가장 남쪽의 소흘읍에 다인종·다문화 지역이 형성되고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 있다.
다인종·다국적 상황의 향남읍 구도심을 관통하면, 발안농협 본점 건물 너머 동쪽으로 농지가 펼쳐지고, 그 너머로 향남읍 행정리의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긴 장벽을 이루고 있다. 향남신도시라 불리는 지역이다. 구도심과 신도시 사이를 가르는 기능을 하는 농지는 머지않아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서해선·신안산선 역세권이 형성되면 이런 빈 땅을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 지난 반세기, 한국의 도시는 그렇게 확대되었다.
향남신도시는 단순히 빈 땅에 들어선 것이 아니다. 이곳에는 지금도 '수용소마을'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이 지명에 대해 "(행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서면 남쪽에 있는 마을. 6·25사변 때 난민 수용소가 있었다"고 적는다. 1979년에 국토지리원이 제작한 지도에는 이 수용소마을 위치에 몇 채의 길쭉한 건물이 그려져 있고, 그곳에 '문화촌'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가건물이던 수용소 건물을 현대적으로 바꾸었다는 뜻에서 문화촌이라는 지명을 붙였을 터이다. 나의 신간 '대서울의 길' 경기도 고양시 일산 신도시 편에서 소개한 것처럼, 고양 일산의 수용소마을도 오스트레일리아 시민들의 지원을 받아서 수용소 건물을 개조하고는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문화촌은 경의선 일산역 서남쪽의 문화공원이라는 이름에 그 기억을 남기고 있다.
6·25전쟁 때 한반도 북부를 탈출한 피란민들은 전국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각지의 원주민들이 살지 않는 벌판이나 계곡에 자리 잡았다. 경기도 고양군(고양시)의 수용소마을은 오늘날 일산신도시로 개발되었고, 서울 강서구의 수용소들은 마곡신도시로 개발되었다. 그리고 화성시의 수용소마을은 향남신도시로 개발되었다. 한때 피란민들이 이곳에 머물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향남신도시에서 월남민이라는 이주민의 흔적이 사라졌다면, 다인종·다문화 지역이 된 향남읍의 구도심 한켠에서는 원주민들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화성우리신협이 자리한 발안장의 남쪽에는 아마도 농촌 시절부터 이어져 왔을 길과 건물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건물에는 '화성시 향남읍'이 아닌 '화성군 향남면'이라는 지명을 남기는 문패가 달려 있다. 2021년 현재 이 마을 바로 옆에는 호텔·모텔촌이 들어서 있고, 이를 위한 기반시설로서 포장도로가 건설되고 있다. 답사 중에 만난 주민은 지형을 살피고 건물 사진을 찍는 우리 답사팀을 경계했다. 도로 건설과 함께 자신들의 마을도 철거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고 말했다.
향남읍에서는 원주민의 흔적도, 6·25전쟁의 피란민의 흔적도 함께 사라져 간다. 이들 선주민의 흔적을 덮으며 새로운 다인종·다문화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다인종·다문화 국가 한국의 21세기 현재사는 경기도 서남부의 한켠에서 계속해서 새로이 쓰여지고 있다. 대도시 사람들만 이걸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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