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최근 내추럴 와인숍이나 바에 가보면 ‘오렌지 와인’과 ‘펫낫’이 눈에 많이 띈다. 이 두 와인이 요즘 ‘핫’해서인지, 지난 칼럼에 살짝 언급한 뒤로 관련 질문을 몇 차례 받기도 했다.
오렌지 없는 오렌지 와인
먼저, 오렌지 와인은 오렌지로 만들지 않는다. 로제 와인과 색이 비슷한 이 와인은 당연히 포도로 만든다. 2004년 영국의 와인 수입업자 데이비드 하비가 색감을 보고 ‘오렌지 와인’이라 부르자고 제안해 붙은 이름이다.
기술적 용어로는 호박색을 띠어 ‘앰버 와인(Amber Wine)’이라 칭한다. 껍질을 함께 넣어 발효시키기 때문에 ‘껍질째 발효된(skin fermented) 화이트 와인’, ‘껍질 침용된(skin macerated) 화이트 와인’, ‘스킨 콘택트 와인(skin contact wine)’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분명 색은 로제와 비슷한데 ‘화이트’ 와인이라니. 여기엔 이유가 있다. 로제 와인은 레드 와인에 쓰는 적포도로 만든다. 로제의 핑크 빛깔은 적포도 껍질에서 비롯한다. 색으로만 보자면 화이트 와인은 청포도로만 만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적포도로 만드는 화이트 와인도 있다. 적포도 껍질을 제거하고 과육으로 주스를 내 발효시키면 화이트 와인이 된다.
반면, 화이트 와인의 한 종류인 오렌지 와인은 청포도로만 만든다. 다만 레드 와인을 발효할 때처럼 껍질과 씨(때로는 줄기까지)와 함께 수일에서 수주, 길게는 수개월 발효한다. 껍질 침용 시간에 따라 황금색부터 분홍빛 재색, 오렌지색, 호박색, 구리색까지 색감이 달라진다. 물론 품종이나 빈티지, 양조 시 산소와의 접촉 여부 등 생산자의 양조방식에 따라서도 색깔이 달라진다. 껍질에서 타닌을 비롯한 페놀성 화합물 등 여러 성분 또한 추출되기 때문에 풍미도 달라진다. 이러한 성분들은 와인의 구조감에 영향을 줄뿐더러 와인이 산화되지 않도록 도와 색감과 와인의 안정성에도 기여한다.
한국에서 유행되기까지
이렇게 만들어지는 오렌지 와인은 한마디로 색, 풍미, 탄닌의 스펙트럼이 넓어 클래식한 스타일에서 개성 넘치는 펑키한 스타일까지 다양하다.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렌지 와인은 4~5년 전부터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이탈리아 북부, 슬로베니아, 조지아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등에서도 생산했다. 요즘은 유럽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생산하고 있다.
초기 생산지에 ‘와인 발상지 조지아’를 언급한 데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오렌지 와인은 그곳에서 수천 년 전부터 만들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와인이 아니다. 과거 조지아에서는 입구만 빼고 땅에 묻은 크베브리(조지아식 암포라) 항아리에 으깬 포도를 통째로 넣어 발효해 와인을 만들었다. 그러다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 이 전통 양조법은 한동안 맥이 끊기기도 했다.
오렌지 와인의 메카라 불리는 이탈리아 북동부의 프리울리와 슬로베니아 서부의 고르슈카 브르다 지역 역시 사정이 비슷했다. 기록을 보면, 이 지역에도 조지아와 비슷한 방식으로 와인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다. 1844년 마티야 베르토베츠라는 슬로베니아의 성직자는 그의 저서 ‘슬로베니아의 와인양조’에서 4~7일간 껍질째(적포도든 청포도든) 침용해 발효하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함투성이" 비판받던 ‘오렌지 와인 아버지’
하지만 20세기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이 지역도 휘말리고 말았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동안, 이 지역을 포함한 국경 마을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었다가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로, 다시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의 전통 와인 양조법은 간신히 맥을 이을 뿐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현대식 와인 양조법이 들어오자 전통 방식은 시나브로 잊히고 말았다.
그러나 ‘정신만 살아 있으면 형체는 언제든 부활한다’고 일찍이 박은식 선생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탈리아의 양조가이자 슬로베니아 혈통인 ‘요슈코 그라브너’와 ‘스탄코 라디콘’은 술도가의 장인 정신으로 전통 양조법을 연구했다. 마침내 20여 년 전, 전통 양조법을 되살려 와인을 빚어냈다.
특히 요슈코 그라브너는 현대적 방식으로 ‘맑고 깨끗하고 아로마가 풍부한’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생산자였다. 그가 만든 와인은 애호가는 물론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만의 와인을 빚기 위해 프랑스 부르고뉴의 양조법을 배웠고, 1987년에는 캘리포니아도 방문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와인을 찾을 수 없었다.
1994년, 문득 그는 ‘할아버지의 양조법’을 떠올렸다. 청포도를 껍질째 발효시키는 방식이었다. 시험 삼아 이 방식으로 양조한 와인을 맛본 뒤 그는 확신을 얻었다. 1997년부터는 현대식 양조법을 버리고 대형 슬라보니안 오크통과 친구에게 선물받은 조지아 크베브리를 이용해 전통 양조법을 되살려 와인을 만들었다.
그는 되살린 전통 양조법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2000년 조지아를 방문해 껍질 침용 와인을 맛보고는 자신의 방식이, 자신의 와인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조지아의 크베브리를 프리울리의 오슬라비아까지 어렵게 공수해, 2001년부터는 크베브리에 껍질 침용된 화이트 와인을 양조하고 있다. 게다가 토종 품종 ‘리볼라 지알라(=레불라)’에 공을 들여 자신의 와인을 완성해갔다. 지금도 조지아에서는 크베브리 양조법을 서방에 알린 그를 고마워한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람살이는 ‘새옹(塞翁)의 말(馬)'이니까. 그라브너의 와인을 맛본 이웃과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혹평했다. “전부 산화됐네” “불안정해” “결함투성이야” “이상해”. 이탈리아의 저명한 와인 매체 ‘감베로로소’ 역시 “요슈코 그라브너가 제정신이 아니다”며 끔찍한 평가를 내렸다.
요슈코 그라브너는 그럼에도 고집스레 자신의 와인을 빚을 뿐이었다. 혹평하던 이들도 하나둘 그의 와인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숙성향과 풍미가 훌륭하다는 평가가 나왔고, 지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있다.
요슈코 그라브너의 여정에는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국경 너머 슬로베니아의 생산자들도 있지만, 같은 마을에서 와인을 만들던 스탄코 라디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요슈코 그라브너와 더불어 오렌지 와인의 두 거장으로 꼽히는 동료이자 경쟁자였다.
스탄코 라디콘은 그라브너의 권유를 받고는 자동차 정비일을 관두고 와인에 뛰어들었다. 20년을 함께한 둘은 비슷한 시기에 ‘껍질째 발효한 와인’을 만드는 시도를 했고, 첫 빈티지로 1997년산 앰버 와인을 동시에 선보였다. 이들 덕분에 ‘부활’한 껍질 침용 화이트 와인은 오렌지 와인이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얻어 지금에 이른다.
오렌지 와인은 대체로 공통된 향이 있다. 이를 두고 ‘숙성향이 나는 복합미’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산화되어 결함이 있는 향’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이 향은 쉽게 말해 ‘매니큐어 냄새’ 비슷하다. 오렌지 와인 앰버서더인 한건섭 대표는 한 유튜브 채널(저스트 드링크)에 출연해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오렌지 와인 생산자들이 주축이 되어 여는 “OWF(Orange Wine Festival, 공식기관은 아님)에서는, 오렌지 와인은 오렌지 껍질향과 매니큐어향이 나야 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날카롭지만 깔끔 ‘리볼라 지알라’ 마셔봤더니
필자는 최근 예의 두 거장의 오렌지 와인을 시음할 기회가 있었다. ‘리볼라 지알라’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었다. 사실 그동안 맛본 오렌지 와인은 색, 맛, 향, 품질이 천차만별인 데다가, 맛과 향이 오렌지 와인에 비판적인 전문가들의 평을 긍정하게끔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두 거장의 와인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말 그대로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오렌지 와인의 언뜻 산화된 듯한 ‘문제의 향’에서는 복합미와 균형감을 갖춘 발랄한 상큼함이 느껴졌다. 잔에 담긴 오일리한 구릿빛 오렌지 와인은 그윽하고 고요한 자태를 뽐내는 가운데 천변만화(千變萬化)했다. 날카롭지만 깔끔한 산도, 입 안을 꽉 조이는 타닌과 미네랄리티, 은은한 매니큐어향과 오렌지껍질향은 물론이고, 레몬, 자몽, 사과, 새콤한 캔디, 복숭아, 살구, 바나나향에 이어 홍차향이 올라올더니 삼나무, 라벤더향이 풍겼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꿀향, 커피향이 그윽해질 무렵 바이올렛향을 담은 분 냄새와 희미한 된장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여러 향이 번갈아 올라와 교차하면서 방 안을 채웠다. 오렌지 와인을 꺼리던 지인에게도 맛을 보였다. 평소 같으면 질색할 법도 한데, 그날의 와인에서는 레드 와인에서 나는 체리향이 느껴진다며 강경하게 쳤던 바리케이드를 슬그머니 물리는 표정이었다.
오렌지 와인은 어디서 양조할까
오렌지 와인의 신세계를 경험했으니, 오렌지 와인에 관한 대표적인 오해 두 가지는 짚어야겠다.
첫째, 오렌지 와인은 내추럴 와인일까? 오렌지 와인은 양조 방식의 한 종류일 뿐이다. 내추럴 방식으로 만드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즉, 둘은 동격이 아니다.
둘째, 오렌지 와인은 암포라나 크베브리에서 양조할까? 아니다. 극히 소수의 와이너리에서 그렇게 양조할 뿐, 대부분은 스테인리스스틸 탱크나 커다란 오크통 등에서 양조한다. 심지어 조지아에서도 10% 정도만이 크베브리에서 양조된다.
자연스러운 기포, 펫낫
오렌지 와인에 취하기 전에 서두에 언급한 펫낫으로 넘어가자.
펫낫(PetNat)은 ‘페티앙 나튀렐(Petillant Naturel)’을 줄인 명칭이다. 페티앙은 ‘기포’로 나튀렐은 ‘자연스럽게’로 번역할 수 있다. 즉 ‘기포가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는 뜻이다. 발효 중인 와인을 병에 넣어 밀봉해 발효를 마무리하면, 병 안에 2~3기압 정도의 이산화탄소가 생기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비교적 탄산감이 약한 ‘약발포성’으로 펫낫 대부분은 왕관 마개로 병을 막는다.
펫낫 역시 갑자기 등장한 와인이 아니다. 1531년, 프랑스 남부의 리무(Limoux) 지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효가 끝났다고 여긴 오크통을 셀러에 보관했는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자 오크통 속에서 재발효되어 자연스럽게 기포가 일었다. 이 방식을 ‘앙세스트랄(선조들의 방식)’이라 한다.
지금도 리무에서는 전통 방식 그대로 와인을 빚는 원산지가 있다. 블랑케트 메토드 앙세스트랄(Blanquette methode ancestrale) AOC이다. 블랑케트(모작) 품종을 선조들의 방식으로 빚은 와인이라는 뜻이다. 앙세스트랄 방식으로 만든 펫낫은 맛은 물론이고 마시는 재미도 있어, 호불호 없이 인기가 많다. 아참, 펫낫은 화이트, 로제, 레드뿐만 아니라 오렌지 와인으로도 만든다.
오렌지 와인과 펫낫은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넘어 21세기 우리에게 도달했다. 와인이 인간에게 내린 자연의 선물이라고 한다면, 두 와인은 전통을 빚어놓은 선조들의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귀는 벗이 친구만인 건 아닌 듯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