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에 프로그램 납품까지 '기현상'
'지상파 선 방송, 인터넷 후 공개' 법칙 깨져
콘텐츠의 시대,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사가 역풍을 맞고 있다. TV를 떠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콘텐츠를 선보이기 위한 인력 이탈이 잇따르고 있다. 2010년대 초반 종합편성채널 개국과 2010년대 중반 한류 바람이 뜨거웠던 중국행 이후 세 번째 엑소더스(탈출)로, 방송가에선 지상파 방송사의 콘텐츠 공동화를 우려하는 얘기까지 나온다.
지상파 방송사와 OTT가 대중문화 주도권을 두고 벌이고 있는 줄다리기는 OTT쪽으로 확 기우는 분위기다. 납품받던 지상파 방송사가 거꾸로 프로그램 하청을 받아 제작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지상파의 위기다.
"지상파 예능 마지막 보루 무너져"
13년 동안 '무한도전'을 만든 김태호 PD는 12월 MBC를 떠난다. 그는 KBS '1박2일'을 연출한 나영석 PD와 2000년대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 2차 엑소더스까지 꿈쩍 않고 MBC를 지킨 김 PD의 퇴사로 지상파 예능의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수많은 이적 러브콜을 뿌리친 김 PD가 MBC를 떠난다는 건 결국 지상파 방송이 콘텐츠 제작과 유통에 있어 한계에 부딪혔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진단했다. 더 이상 TV가 콘텐츠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매력적인 매체로 여겨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파에 콘텐츠를 유통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시청률을 담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데다 창작 소재 등 콘텐츠 관련 제약은 더 엄격해져 경쟁력을 잃은 탓이다. 김 PD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퇴사 소식을 직접 전하며 "세상에 나쁜 콘텐츠 아이디어는 없다. 단지 콘텐츠와 플랫폼의 궁합이 안 맞았을 뿐" "여러 플랫폼에서 다양한 콘텐츠로 그걸 증명하고 싶다"고 강조한 것을 보면, 지상파 채널의 위기에 대한 그의 고민이 엿보인다. 김 PD는 종편이나 CJ ENM으로 이적하지 않고 독자노선으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OTT와 협업에 나설 예정이다.
'펜하' '동백꽃' PD도 사표... 콘텐츠 공동화 위기
지상파 방송사 PD들에게 OTT는 '기회의 땅'이다. ①블록버스터급 제작비를 받고 ②온라인 콘텐츠로 소재와 표현 제약에서 쉬 벗어나 제작을 할 수 있어서다.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상파 PD 최소 6명이 올해 방송사를 나와 OTT로 이적하거나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동백꽃 필 무렵'으로 주목받은 차영훈 KBS PD는 올초에, '펜트하우스' 시리즈를 제작해 화제를 모은 주동민 SBS PD는 6월에 면직 처분됐다. 김 PD를 비롯해 지상파 3사의 간판 PD가 모두 올해 홀로서기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나라 서인국 주연의 '너를 기억해'를 만든 노상훈 KBS PD는 지난 6월 OTT인 디즈니플러스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연출한 조영민 SBS PD와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를 제작한 나수지 KBS PD가 올 상반기 카카오TV로 옮겼다.
디즈니플러스는 11월부터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다. '저스티스리그' 등을 기획한 워너브라더스 OTT HBO맥스도 국내 론칭을 준비 중인 것을 고려하면, 지상파 방송사 PD들의 이탈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워너의 클레멘트 슈베빅 한국·동남아시아총괄 책임자는 8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국제방송영상 콘텐츠마켓 2021'에서 "한국에 있는 팀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며 "HBO 드라마 등의 현지화 제작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MBC에서 만들었는데 MBC에서 볼 수 없다고?
'지상파 선 방송, 인터넷 후 공개' 법칙도 깨졌다. MBC는 김태호 PD가 제작 중인 예능프로그램 '먹보와 털보'를 넷플릭스에 단독 공개한다. MBC PD가 제작했지만, 정작 그 콘텐츠를 MBC에서 볼 수 없다. MBC와 넷플릭스에 확인한 결과, '넷플릭스 단독 공개'로 계약이 이뤄졌다. 넷플릭스의 '외주'를 받아 MBC가 제작사 역할을 한 것이다. 지상파 PD가 콘텐츠를 제작해 소속 방송사가 아닌 다른 플랫폼에 콘텐츠를 유통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플랫폼의 권력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MBC 예능본부는 본보에 "MBC는 방송사이자 콘텐츠 제작사"라며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시도의 하나로 이번 프로젝트가 진행됐다"고 밝혔다. 넷플릭스는 '먹보와 털보' 제작에 약 60억 원을 투자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상파 방송사 부장급 예능 PD는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TV 예능 한 회 제작비가 1억 원 선"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예능이 시즌 기준 최다 10회('범인은 바로 너')로 제작되는 것을 고려하면, TV보다 회당 제작비 6배가 넘는 블록버스터급 투자다. MBC가 자사 공개를 포기하고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파는 배경이다. 박성제 MBC 사장은 지난 6일 방송문화진흥회 업무 보고에서 '먹보와 털보' 외 넷플릭스와 다큐멘터리 추가 기획 계획을 밝혔다.
'경쟁 TV와 동시 편성' 불편한 동거까지
힘 빠진 지상파 방송사의 현실은 '케이블채널과 공동 편성'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배우 김수미와 방송인 박명수 등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수미산장'을 KBS는 스카이채널과 올 상반기에 함께 내보냈다. 제작비 부담을 덜려는 지상파와 좀 더 시청자가 많은 곳에서 프로그램을 노출해 채널 인지도를 쌓으려는 중소 케이블채널과의 이해가 만났다. 경쟁 채널의 '불편한 동거'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예전엔 '전국노래자랑' 하면 KBS식으로 플랫폼이 부각됐는데, 이젠 콘텐츠가 더 중요해진 시대"라며 "경쟁 채널의 동거는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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