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네 살 된 딸을 키우는 30대 직장인입니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있는 남편과 별거 중인데, 아이를 위해 남편의 치료를 돕고 이 가정을 지켜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십니다. 640㎖ 페트병 소주 2, 3병을 365일 중 360일 정도 마셔요. 일하는 날은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하면서부터 새벽 2, 3시까지, 쉬는 날은 낮부터 마십니다. 출산하고 병실에 누워 있는 제 옆에서도 술을 마셨던 사람입니다.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지각이 잦고, 최근에는 회사에서 이 때문에 징계를 받았을 정도입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권하지만 완강히 거부합니다.
왜 그리 술을 마시는지 물어보면 "스트레스 풀 데가 없다"고 말해요. 얼마 전에는 자신이 술을 마시는 원인 중 하나가 '너'라면서 제가 자신의 말에 사사건건 반대해 스트레스를 받아 마신다고 하더군요. 저도 처음에는 좋게 타일러도 보고, 운동을 권하기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게임에 몰두할 때는 술 생각이 덜 난다고 하기에 집에 게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줬더니 이제는 게임을 하면서 술을 마시는 지경이 됐어요.
남편은 술을 마시면 난폭해집니다. '불쌍한 것 데려와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고마운 줄 모른다'며 저를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가구나 집기를 던집니다. 이런 성향은 신혼여행 때 처음 알게 됐어요. 술을 마신 후 저와 사소한 일로 다퉜는데, 갑자기 제게 선물했던 노트북을 바닥에 던졌어요. 연애를 1년 했는데 그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이라 그대로 얼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빠가 된 후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아이 앞에서도 술을 마시고 고성을 내며 폭언을 하고, 기물을 파손해요. "엄마는 아빠에게 양보하는데 아빠는 왜 그래요?" "아빠는 왜 맨날 화만 낼까? 아빠 나쁘다"며 아이가 말릴 정도입니다. 술 먹고 화를 내는 이유도 사소해요. 얼마 전에도 술 마시고 들어와 "에어컨을 틀자"고 하는데 제가 (관리비를 아끼자는 생각에) "샤워하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이유로 가구를 던져, 저는 그 길로 집을 나왔습니다. 그 날 이후 아이와 함께 두 달가량 친정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히 남편은 제가 돈을 벌지 않는다며 걸핏하면 불만을 표시했어요. 저는 결혼할 당시 아직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었습니다. 월 20만 원 정도 됐어요. 남편도 알고 있었고 제가 이 문제로 결혼을 좀 미루자고 하자 "함께 갚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임신, 출산을 거치며 경력 단절이 되자 말이 바뀌었어요. 남편이 저 모르게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학자금 대출을 갚아달라고 했더군요. 저희 친정이 그럴 형편이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요. 그래서 아이가 생후 7개월쯤 됐을 때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다시 취업했고 월 100만 원 정도를 벌어 생활비에 보태고 있습니다. 반면 남편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아요. 매일 출퇴근을 택시로 해서 한 달 택시비만 40만 원 넘게 나온 적도 있습니다.
남편은 시댁 식구와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주로 아버님과 많이 부딪쳤고 결혼 전에는 연락처도 모르고 지낼 정도로 소원했다고 해요. 부모님이 늘 누나와 비교해 힘들었다고 하며 엄격한 아버지와 바쁜 어머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불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다시 가까워졌고, 시부모님은 지금처럼 갈등이 심해질 때면 남편을 나무라시고 저희 부모님께도 사과하시는 등 항상 제 편에 서 주십니다.
집을 나올 때는 이혼을 마음먹었지만 막상 현실적 문제를 떠올리면 막막해져요. 남편에게 위자료를 기대할 상황도 아니고, 제가 모아 놓은 돈도 없습니다. 남편의 알코올 중독 치료가 가능하다면 아이를 위해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아이의 아빠로, 제가 선택한 남편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게 할 수는 없을까요. 이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조선미(가명·32·직장인)
선미씨,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흔히 부부간 갈등은 양쪽 말을 다 들어 봐야 된다고 해요. 하지만 선미씨 사례는 부부간 소통이 부족해서, 오해가 있어서 생긴 문제가 아니에요. 선미씨 가정의 문제는 모두 남편의 알코올 중독에서 기인하고 있어요.
남편 분은 알코올 중독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언제나 술을 마시는 이유가 있다는 거지요. 어떤 날은 기분이 나빠서,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아서, 어떤 날은 그냥 술을 마십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대개 자신이 술과 관련된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술 마시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그 이유를 찾습니다. 무엇보다 선미씨 남편은 알코올 중독 문제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어요. 문제 해결은 자신의 문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남편은 반복적으로 '네가 스트레스 받게 해서 술을 마신다'는 식으로 남 탓을 합니다.
알코올 중독은 진단명이 있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병입니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뼈를 깎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해요. 유전적 요인도 있어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치료의 시작이 문제의 자각이라는 점이에요. 환자 분들은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제가 마음만 먹으면 술을 끊을 수 있습니다"라고 쉽게 장담합니다. 그런데 알코올 중독 치료의 길은 결코 쉽고 순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저는 알코올 중독자이니, 술 권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 중독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었다고 보고 치료가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지금 선미씨 가정에서는 가장 중요한 당사자, 남편을 뺀 나머지 주변 사람들만 문제 해결을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어요.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건대, 선미씨 남편은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한 사람인 것 같아요. 살아 있는 사람 중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스트레스란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처리해야 하는 외부 자극입니다. 만병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이를 잘 관리한다면 인간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남편은 이런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유일하게 술로, 술을 마시고 폭력적인 방식으로밖에 해소하지 못해요. 이런 분들은 대체로 일상생활에서 맨정신으로는 할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떨 때는 싫은 소리도 해야 되고, 용서도 구해야 되고, 고마움이나 섭섭함을 표현해야 하는데 술 없이는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미씨 남편이 '상처'라고 여기는 것들도 사람들이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범주에 들어가는 일들입니다. 남편은 누나와 비교당하며 자라서, 바빴던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완벽한 부모는 없으니 부모가 자식을 섭섭하게 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어요. 상처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미씨 남편은 학대, 전쟁, 자연재해 등 충격적 사건·사고가 아닌, 사람들이 살면서 통상 겪는 생활 자극도 이를 주관적으로 왜곡해서 해석하고 과도하게 반응합니다. 더군다나 부모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이 지금 자신이 딸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이기적이지요.
아이의 입장에서 한번 볼게요. 놀이는 유아기 아이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놀이는 곧 상호작용을 의미해요. 흙, 나무와 같은 자연과도 가능하죠. 특히 부모와 같은 중요한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아이의 뇌 신경 발달이 폭발적으로 이뤄지게 돼요. 이를 고려하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놀아주는 아빠가 그래도 이혼해서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선미씨 남편은 그 어쩌다 한 번을 제외한 수많은 시간에 아이한테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난폭한 행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물리적 힘에 의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게 향후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학술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이가 아동기에 접어들면 부모를 통해 도덕·윤리적 기준을 배우게 됩니다. 부모는 인간의 도리와 인간을 대하는 태도,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보여주는 아이의 거울이에요. 그런데 지금 선미씨 딸은 술 마시고 엄마를 공격하는 아버지를 목격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이 역시 가정 폭력에 해당됩니다.
아울러 남편은 자기중심적이고 경제권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해요. 아이가 더 자랐을 때, 남편은 선미씨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이런 성향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요. 남편은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면서도, 선미씨를 지원하는 돈은 아까워해 결국 선미씨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죠. 만일 아이가 나중에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어 학원비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남편이 여력이 된다 한들 그 돈을 선뜻 지원해 줄까요. 딸에게는 아까워하지 않을까요. 결국 딸도 남편이 인색하게 구는 대상에서 예외가 아닐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선미씨 남편은 집중적, 체계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문제를 인정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냉정히 말하자면, 달라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더욱이 알코올 중독이 상당 기간 진행되면, 판단력이 떨어지고 인격이 황폐해집니다. 현실 세계에서 윤리적 기준이 작동하지 않고 무너지게 돼요. 이런 상태로 가정을 유지하면 선미씨나 아이의 삶은 더 피폐해질 거예요. 아이에게도 함께 살며 1년 내내 광폭한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떨어져 살며 술에 취하지 않은 아빠의 모습을 가끔 보는 게 긍정적일 거예요.
선미씨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보여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가 어리고 경제적 문제로 이혼이 망설여지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혼이 어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도, 선미씨의 인생을 위해서도 남편과는 헤어져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사연을 보면, 선미씨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가면 아이가 크면서 삶도 점차 안정될 거예요. 당장 힘드시겠지만 용기를 내서 한 발짝 걸어 나가세요. 선미씨와 딸의 건강한 인생을 응원하겠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oh-counseling)를 통해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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