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 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한국일보>
'이것은 소설책인가, 과학책인가.' 작가 이름과 도발적인 제목에 혹해서 아무런 정보 없이 책을 집어 들고 정신없이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분명히 아주 재미있는 소설책인데, 간간이 나오는 정보의 밀도는 웬만한 과학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의 원서가 나왔던 일본에서도 일본식물학회가 2019년에 '특별상'을 줬단다.
일본의 인기 작가 미우라 시온의 '사랑 없는 세계'(은행나무 발행) 이야기다. 도쿄대를 모델로 한 듯한 도쿄 T대학 근처에는 허름한 양식당이 있다. 손님이 원하면 본류인 양식뿐만 아니라 일식까지 만들어주는 이 식당은 맛만은 최고여서 T대학 교수와 학생을 비롯한 단골이 여럿이다.
이 양식당에 훌륭한 요리사를 꿈꾸는 20대 청년 후지마루가 숙식까지 해결하는 직원으로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대체, 과학 이야기는 언제 나오냐고? 이제 세 쪽을 읽었을 뿐이다. 어느 날, 후지마루는 양식당 단골손님이 T대학에서 식물학을 연구하는 실험실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일행 가운데 같은 또래 여성 모토무라가 있다.
모토무라는 애기장대(Arabidopsis thaliana)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초짜 식물학자다. 그는 옷도 (점잖게 말하면 입술과 닮은) 식물의 기공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만 고집할 정도로 식물 연구에 푹 빠진 과학자다. 그는 후지마루가 자신이 좋아서 안달이 난 사실도 모른 채 계속 곁을 준다. 실험실을 보여주고, 연구 내용도 설명하고. 후지마루의 구애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경고하지만, 달콤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특별한 ‘사랑’ 이야기다. 우선 독자는 대책 없는 순정파 후지마루의 구애가 성공할지 궁금할 것이다. 그렇게 둘의 밀고 당기는 연애 이야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다른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뺏긴다. 바로 모토무라의 아낌없이 주는 식물 사랑. 소설책에서 과학책으로 장르가 바뀌는 대목도 이때다.
후지마루의 ‘사랑의 라이벌’ 애기장대부터 궁금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길이나 산길을 걷다가 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애기장대를 과학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건 어떨까?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나서 'PCR(Polymerase Chain Reaction)'는 열 살짜리 아이도 아는 과학 용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PCR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증을 풀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재미가 떨어지지도 않는다. 사실 이 소설을 쓴 미우라 시온은 일본에서 소설 한 편으로 140만 부를 판 적이 있는 작가다. 나도 그 베스트셀러 소설 '배를 엮다'(은행나무 발행)를 읽고서 팬이 되었다. 미우라는 이 소설에서 일본어 사전, 그러니까 국어사전을 만드는 출판사 편집부 직원의 이야기를 그려서 깊은 감동을 줬다.
이 작가는 일상생활을 그리며 삶의 의미를 독자와 나누는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사랑 없는 세계'에서도 작가의 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후지마루에 감정이입해서 모토무라와 그 동료로 대표되는 과학자의 일상생활을 엿보고, 더 나아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
이 책을 읽고서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진짜 삶이 궁금해졌다면,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 발행)을 읽어보자. 만약 '랩 걸'을 이미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이 색다른 소설도 분명히 좋아하리라 확신한다. 또 이 책을 읽고 나면 애기장대를 검색해서 사진을 찾아보고, 들길이나 산길을 걷다가 발견하면 괜히 반가울 것이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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