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의' 시즌2 신스틸러
은지 엄마 배우 이은주, 민찬 엄마 이지현
편집자주
훗날 박수소리가 부쩍 늘어 문화계를 풍성하게 할 특별한 '아웃사이더'를 조명합니다.
중2인 아들의 기말고사 과학 점수는 18점이었다. 3번으로 죄다 찍어 받은 점수라고 했다. 40대 워킹맘 이승주(가명)씨는 아들을 단단히 혼내려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슬의)' 시즌2를 보고 마음을 돌렸다. "아들, 딸 심장 이식 기다리는 두 엄마를 보고 울었거든요. 그래서 아들을 혼내지 않았죠. 건강이 최고란 생각에." 퇴근한 이씨의 속을 그의 아들이 뒤집어 놓은 시간, 마침 TV에선 병원 중환자실 밖에서 두 엄마가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온라인엔 "은지, 민찬 엄마만 나오면 눈물이 줄줄"이란 글이 쏟아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매일을 조명해 시청자를 울컥하게 한 '슬의' 시즌2의 신스틸러는 은지 엄마와 민찬 엄마였다. 극 중 은지 엄마는 심장이 아픈 아이의 이식 수술을 위해 기증자를 기다리며 중환자실을 다섯 달 동안 지켰고, 민찬 엄마는 아이가 놀이터에서 갑자기 쓰러져 이제 막 병원살이를 시작했다. "우리 마라톤 선수예요. 으휴, 엄마가 벌써 이러면 어떡해". 자식 걱정으로 입술이 한여름 마른 땅처럼 쩍 갈라진 민찬 엄마를 은지 엄마는 이렇게 토닥인다.
두 배우는 옥상에서 말라가는 화분처럼 위태롭게, 때론 단단하게 두 엄마를 연기했다. 16일 종방한 '슬의'를 빛낸 숨은 주인공인 은지 엄마를 연기한 배우 이은주(41)와 민찬 엄마를 맡은 이지현, 두 배우를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저희 사실 친구예요." 99학번인 두 배우는 실제 '99즈'(99학번 동기 다섯 주인공을 일컫는 말)였다.
-두 엄마를 보고 시청자들이 울더라.
"은지 엄마처럼 살고 싶다는 글을 봤다. 대본을 읽고, 힘들어도 쉬 흔들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손 내밀 줄 아는 은지 엄마의 결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은주)
"아이가 심장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공감하면서 봤다는 댓글을 읽었다. 나랑 은주를 캐리커처로 그려 준 분도 있고. 다들 고마웠다."(지현)
-"기적"이란 말을 많이 했다.
"뒤늦게 병원에 들어온 민찬이의 심장 이식이 먼저 결정 났을 때의 대본은 조금 결이 달랐다. 신원호 감독과 얘기하며 '웃자'로 방향을 잡았다. 은지 엄마라면 정말 축하를 해줬을 거 같았으니까. 민찬이 이식 축하하고 난 뒤 '밥을 먹어도 되나'라고 감독에게 제안했다. 삶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은주)
-연기하며 여러 생각이 들었을 텐데.
"아이를 키운 경험도 없고 너무 막막했다. 그래서 이식 수기를 찾아봤다. 심장 이식을 경험한 분이었는데, 병상 일지 등을 빼곡히 인터넷에 올려놨더라. 아이가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가기까지의 과정을 일기로 쓴 엄마도 있고. 그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내 연기가 그분들의 삶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싶었다. 병원 관련 다큐멘터리도 엄청나게 찾아봤는데, 밝은 엄마가 적잖더라. 아이가 반드시 일어날 거라 믿으니까 그렇지 않았을까. 은지 엄마도 그럴 거라 믿었다."(은주)
-정경호가 둘이 친구라고 하던데.
"80년생 모임에서 2~3년 전 만났다.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로, 수다도 떨고 같이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곤 한다. 동갑이라 묘하게 무장해제된다랄까. "(지현)
-둘이 '슬의'에 함께 출연해 놀랐겠다.
"1월에 은주와 만났다. 각자 오디션 보고 왔다고만 얘기했지, 어떤 작품인지는 서로 물어보진 않았다. 그런데 2월 '슬의' 제작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같이 (연기로) 붙는 엄마가 있다'면서. 그게 은지 엄마였고, 은주였다. 그때 놀랐다".(지현)
-'슬의'가 어떤 작품으로 남았나.
"편견을 깨줬다. 너무 큰일이 닥쳤을 때 그 위기 혹은 분노를 눈물로 해소하려는 게 언제부턴가 꺼려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을 때도 그냥 울며 흘려보내면 안 될 거 같더라. 어떤 면에서 내게 눈물은 귀하다. 그런데 '슬의'를 하면서 눈물의 귀한 값어치를 알게 됐다. 같이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은주)
이지현은 2005년 창작 뮤지컬 '수천'으로 데뷔, 연극 '리어외전' '나는 광주에 없었다' 등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 고선웅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유명 극단 마방진 소속이다. 이은주는 "첫 작품을 한 극단이 사라졌다"고 웃으며 데뷔작을 끝내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는 연극 '에쿠우스' 등에 섰고, 최근 영화 한 편을 찍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대학로에서 어떻게 버텼나.
"아, 술 생각난다."(지현)
"20~30대 함께 연기하던 친구들이 떠났다. 어느 순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니 여배우로서 역할 제약도 컸고. 이 일을 너무 좋아하는 데 일이 뚝 끊겨 그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땐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게 싫고,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러다 희망이 보이는 시간이 찾아왔고, 올해부터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단역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경험하지 않은 인물로 언제 살아보겠나. 그렇게 커리어가 쌓이는 거니까."(은주)
-지금 화두는 뭔가.
"직업윤리다. 옛날엔 영화 '비트' 보고 다들 멋있어 했잖나. 17대 1로 싸우는 걸 낭만으로 생각하는 시대였으니까. 그때 우린 문제의식이 없었다. '슬의'를 하면서 연기의 영향력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됐고, 배우로서 직업윤리를 고민하게 됐다."(은주)
"연극 '보도지침'에 11월까지 출연한다. 제5공화국 시절 1986년 얘긴데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으로) 그 상황이 현재진행형인 것 같아 책임감도 든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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