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디지털 기술과 금융의 결합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특히 디지털 자산은 금융의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있다.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도 빠르게 발전 중이다. 기승전비트코인은 기술, 금융, 투자, 정책 등 디지털 자산 시장을 입체적으로 스캐닝한다
세계 첫 상장 암호화폐거래소 코인베이스 CEO가 분노한 이유
코인베이스는 세계 최초로 증권시장에 입성한 암호화폐 거래소다. 디지털 자산시장이 기존 경제 시스템에 마련한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코인베이스를 이끌고 있는 브라이언 암스트롱 CEO는 노련한 사업가다. 코인베이스 상장 전 감독 당국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소송 전을 시작한 암호화폐 리플(XRP)을 제일 먼저 상장 폐지했다. SEC 출신의 고위 임원을 영입하기도 했다.
암스트롱은 상장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마자 워싱턴으로 달려갔다. 의회, 연준 관계자들을 만나 디지털 자산시장에 대해 알리고, 정책 당국의 협조를 구했다. 이처럼 체제 순응형이던 암스트롱이 지난 8일 폭발했다. 트위터에 SEC를 맹비난하는 트윗을 21개나 연속으로 올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일단 하지마. 그래도 하면 소송한다”
사건은 3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인베이스는 당시 암호화폐를 담보로 대출을 해주는 서비스를 준비 중이었다. 가상자산 업계에 일반화된 스테이킹(staki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자신의 코인을 거래소에 맡긴다. 대신 일정한 수익을 배분받는다. 거래소는 이렇게 모은 코인을 대출 형식으로 제3자에게 빌려준다. 암호화폐를 빌려가는 사람은 보유 중인 다른 암호화폐를 담보로 제공해야 한다. 수익이 짭짤하다. 대출 이자가 높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수익을 나눠 주고도 코인 예치와 코인 담보 대출을 중개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
반면 코인베이스는 일단 스테이킹 대상 코인으로 USD코인이라는 '스테이블코인'을 지정했다. 이후에 다른 암호화폐로 서비스를 확장할 계획이었다. 스테이블코인은 가치가 안정적인 코인이다. 1USD가 1달러에 연동된다.
코인베이스 경영진은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에 SEC와 접촉했다. 서비스 내용을 설명하고, 사전에 준수해야 할 규정을 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SEC는 각종 자료를 요구했다. 코인베이스는 성실하게 자료를 제출했다. 하지만 SEC의 최종 결정은 “해당 서비스를 하지 말라. 만약 우리 경고를 무시하고 사업을 하면 소송에 직면할 수 있다”였다.
“누굴 위한 규제인가?”
암스트롱은 “암호화폐 담보대출은 이미 다른 곳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라며 “왜 코인베이스는 하면 안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어떤 업무가, 왜 증권 업무인지를 그 누구도 설명하지 않고, 소송을 할 테니 하지 말라는 협박만 있다”며 “코인베이스는 SEC가 지침을 시행하면 따를 것이지만, 업계 전반에서 동등하게 시행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SEC가 무엇이 허용되어야 하고, 왜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달라는 것이다. SEC는 서면으로 설명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비공개로 협박 전술을 펼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암스트롱은 “SEC가 새로운 서비스 제공을 막는 것은 소비자들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큰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암스트롱은 지난 5월 워싱턴에서 정부 관계자들을 만난 얘기도 했다.
“나는 의회 의원들과 다른 연방정부 수장들과 미팅을 했다. 미국에서 상장한 첫 번째 크립토 회사가 된 직후였다. 겐슬러 SEC 위원장과 불과 한 달도 전에 약속을 확인했는데도 SEC는 만남을 끝내 거절했다.”
암스트롱은 “우리는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도 전에 SEC로부터 법적 조치를 받을 수 있다는 위협을 받고 있다”며 “SEC가 소비자들과 기업들에 피해를 주지 않고 이 산업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명확한 규제를 만들기 위해 나서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변하는 시장, 쫓아가는 정책 당국
SEC와 코인베이스의 갈등과 충돌은 곧장 업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날 코인베이스 주가는 큰 폭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제 갓 증시에 입성한 코인베이스가 SEC와 정면 충돌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감히 당국에 대들다니.
SEC와 코인베이스의 갈등은 미국 금융시장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디지털 자산의 부상이 기존 시장과 감독 체계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스테이킹은 블록체인 기술과 접목, 디파이(DeFi)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다.
암호화폐 예치와 대출을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으로 시행하는 금융 서비스다. SEC는 코인베이스가 암호화폐 담보대출을 할 때의 파급 효과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 규제의 틀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 서비스를 용인해도 되는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SEC는 새로운 디지털 금융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벌고 싶어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완전히 시장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는 고전적인 규제의 틀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SEC 입장에서 전가의 보도는 ‘증권(security)’이라는 범주 안에 코인을 묶는 것이다. 일단 증권이라고 판명이 나면 기존 증권법에 따라 규제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무엇이 증권인가. SEC가 사용하는 판례는 1940년대에 만들어진 호위 테스트(Howey Test)다. 이 판례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의 행위로부터 이득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거의 모두 증권 투자 계약”이다.
SEC는 이 원칙에 따라 2020년 12월 암호화폐 리플을 무허가 증권 판매 혐의로 기소한다. 80년이나 된 법 체계가 21세기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이 너무 빨리 커졌다
블룸버그 통신은 코인베이스와 SEC의 충돌에 대해 전 SEC 인사의 코멘트를 보도했다. SEC의 태도를 보고 자신도 깜짝 놀랐다는 것. SEC는 보통 투자 상품이 팔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규제의 칼을 들이댄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품이 나오기도 전에 경고를 하고, 소송을 예고했다. 첨단 암호화폐 상품을 차단할 강력한 방법으로 소송을 택한 것이다. 듀크 대학 로스쿨 제임스 콕스 교수는 “SEC가 정말 오랜만에 처음으로 매우 공격적으로 변했다”며 “암호화폐 시장에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진단했다.
규정이나 제도가 따라가기에는 시장이 너무 앞서 나가다 보니, ‘증권법’을 무기로 일단 막고 보자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이 시장이 너무 빨리 커졌고, 무질서가 난무하는 척박한 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SEC 게리 겐슬러 의장 자신도 서부시대 같다는 표현을 쓴 바 있다.
크립토 혁명, 다음 격전지는 디파이
콜롬비아 비즈니스 스쿨의 R A 파로카니아 교수는 “코인베이스는 금융 혁신을 대표하고 있다”며 “규제 당국은 새롭고 새로운 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마켓워치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크립토 혁명이고, 다음 격전지는 디파이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SEC도 소송으로 급한 불을 끄고 있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유니스와프라는 최대 규모의 디파이 플랫폼을 내사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SEC가 디파이 등 크립토 파이낸스에 대해 관련 기업들로부터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리서치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파로카니아 교수는 “암호화폐가 금융 생태계 일부가 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명확한 규제 틀이 없다”며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허용하지 않을 것인지 가이드가 없다”고 지적했다. SEC도 공부를 하면서 규제의 틀을 만드는 단계에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장을 놓고 금융당국과 혁신 기업들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화와 논리로 해법을 찾을 준비가 돼 있는지가 중요하다. 파로카니아 교수는 SEC가 업계와 협력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표명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금융당국은 어떨까.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로 시장을 경악시킨 고위 공무원이 생각난다. 우리는 금융 혁신을 할 수 있을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