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반시설? 등 오염에 정부도 책임 있는데
주민들 이주 요구에도, 대책은 제자리걸음
"예산 한계" 지자체 호소에도 중앙정부는 뒷짐
◆국가가 버린 주민들<2부> 방치된 시스템 ⑦이주대책은 언제
편집자주
어느 곳에 사느냐는 권력의 척도가 됐다. 소각로·공장·매립장이 들어서며 병에 걸리고 목숨을 잃었다는 사람들. 암으로 수십 명이 사망한 곳도 있다. 그런데, 목숨에도 등급이 매겨진 걸까. 정부는, 사회는 조용하다. 서울 한복판이라면 어땠을까. 지난 10년 주민들이 '인근 시설로 환경이 오염돼 질병에 걸렸다'며 환경부에 건강영향조사를 청원한 곳은 8곳에 이른다. 대책 없이 방치된 이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못 살겠으니, 제발 이주계획을 세우거나 환경 개선이라도 해 달라"는 강원 동해시 송정동 주민들의 청원은 2018년 국민권익위원회을 시작으로, 2019년 환경부·해양수산부·동해지방해양수산청을 빙빙 돌았다. 면피성 답변만 받는 동안 주민들의 좌절은 깊어졌다.
시멘트, 석회석, 아연ㆍ망간 정광석, 석탄원료 등을 운반하는 동해항에서 불과 50m 떨어진 이곳 주민들은 오염 먼지에 시달리며, 폐질환을 앓아왔다. 1979년 국가 주도로 개항한 국가기반시설이니, 그 전부터 터를 잡고 있던 송정동이 겪은 고통의 가해자를 찾는다면 분명 정부다.
한국일보는 지난 10년간 오염으로 인해 정부에 주민건강영향조사 청원을 한 전국 8개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이주계획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이 없어 쩔쩔 매는 가운데 정부는 남의 일처럼 방관만 하면서, 주민들의 생명은 덧없이 줄어들고 있다.
"집 안 팔려" 오염 지역에 묶인 사람들
동해시 송정동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빈집일 정도로 인구가 줄었다. 김동운 송정동장은 "1973년 송정동 주민은 1만3,00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3,300명밖에 안 된다"며 "젊은 층이 많이 빠져나갔는데 일자리 문제보다도 주거환경 문제가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3개 소각로가 몰려 지난 10년간 100명의 암환자가 발생한 충북 청주시 북이면 일대도 기자가 주민의 안내를 받아 둘러본 마을에는 마당에 풀이 무성한 빈집이 많았다.
모두가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집단 암발병 피해를 입은 전북 익산시 장점마을 주민 배유경(54)씨는 그곳에서 부모를 모두 잃었지만 떠날 수 없었다. 배씨는 말했다. "제가 TV에서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동네 사람들을 보며 ‘왜 해마다 저렇게 홍수가 나는데 못 떠날까?’ 그랬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못 떠나요. 쉽지가 않아요."
200개의 공장이 들어서 고통받는 인천 사월마을 주민 권순복(74)씨는 "이사를 가고 싶어도 '쇳가루 마을'로 소문이 나서 집도 안 팔린다"고 했다. 중금속 오염으로 주민들 눈에도 쇳가루가 들어갈 정도의 극한 환경이다.
충남 천안시 장산5리의 우금제(59)씨는 "자식들은 하루라도 빨리 동네를 떠나라고 난리지만 집도, 땅도, 일궈놓은 터전이 다 여기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장산5리는 인근 공장에서 나오는 유해물질로 주민들이 집단으로 암에 걸렸다는 의혹이 있고, 우씨도 난소암을 앓고 있다.
4개 정부기관에 호소한 결과는
송정동 주민들의 이주 요구에 대해, 동해시는 2016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전비와 보상비로만 4,500억 원이 들 것으로 예상돼 시비로는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동해시는 해양수산부의 ‘제3차 전국 항만 기본 수정계획’에 동해항 항만배후단지 지정을 요청했다. 항만배후단지란 항만구역에 지원시설과 휴양시설 등을 설치하고 기능을 높이기 위해 일반업무ㆍ판매ㆍ주거시설 등을 조성한 곳을 말한다. 동해시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보상비로 주민들을 타 지역으로 이주시키고자 했다.
해수부는 거절했다.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였다. 동해시 관계자는 “보통 항만배후단지는 허허벌판이나 매립지 등을 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비나 보상비가 거의 없다”며 “그런데 송정동의 보상비로만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2018년 3월, 국민권익위에 항만배후단지 조성과 집단이주 청원서를 제출했다. 권익위는 “소관부처에서 사업타당성 등을 살펴보고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며 “권익위가 판단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주민들은 그해 해수부에는 ‘항만 내 시설물 완전 이전’ 청원을 냈다. 주민 이주가 불가능하면 환경개선이라도 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동해항은 국가기반시설이라 시설물 이전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주민들은 2019년엔 환경부에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의 민원은 환경부에서 해수부로, 해수부에서 동해지방해양수산청으로 이송된 끝에 “동해ㆍ묵호항 중장기 환경개선 대책을 차질 없이 추진해 비산먼지 저감의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나도록 노력해 나가겠다”는 반복된 내용의 문서만 받았다. 현실적이거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정부기관은 한 곳도 없었다.
권오민 송정동번영회장은 “주민들이 40년 동안 고통받고 살아 왔는데, 정부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주민들에게 그냥 죽으라는 소리를 하는 것으로 들린다”고 낙담했다. 정부 대책에 대한 기대를 접은 송정동 주민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이 진정되면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집단이주 조항 필요" 법 개정 요구도 묵살
2019년 8월 사월마을은 환경부 조사에서 ‘주거 환경 부적합’ 평가를 받았다. 2015년부터 주민들이 싸워 얻어낸 값진 성과였다.
이 결과를 토대로 사월마을 주민들은 인천시에 집단이주를 요청했다. 시 관계자는 “집단이주를 하려면 조례가 필요하고, 조례를 마련하려면 근거 법령이 있어야 한다”며 “환경보건법에 이주 관련 조항을 넣어 달라고 환경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환경부는 서면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환경부는 추후 협의 과정에서 '이주 문제는 도시개발법,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등에 이미 근거가 있으니 기존 법을 토대로 검토하면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환경부가 언급한 법은 해당 지역이 도시개발 지역으로 지정돼야 적용 가능하다.
정부 조사에서 '주거 환경 부적합' 지역으로 결론 난 곳조차,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실효성 있는 법령이 없다. 관련 법이 없으니, 모든 게 지자체의 재량에 맡겨지며 지자체는 비용 부담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동해시 관계자는 “(집단이주 비용은) 지자체 입장에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국비가 투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경보건법은 ‘건강영향조사 결과에 따른 조치’를 명시하고 있고 환경부 장관과 지자체장 모두에게 환경개선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환경부는 주민 이주대책에 사실상 손을 뗀 상태다.
조례 마련도 쉽지 않다. 지난 6월 인천시의회에서 ‘수도권매립지 주변지역 환경개선 특별회계’를 사월마을 주민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조례안이 상정됐으나 부결됐다. 자금 사용 목적을 ‘환경개선’에서 ‘환경개선, 주거환경 부적합 문제 해결 및 환경피해 주민 지원’으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수도권 매립지 특별회계'는 폐기물 반입 수수료의 50%가 주 세입원으로, 지난해 약 3,607억 원이 걷혔고 체육시설 건립, 공원 조성 등에 약 1,291억 원만 지출했다.
전재운 시의원은 “시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사월마을 이주 지원에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김선홍 글로벌에코넷 상임회장은 “시가 직접 피해를 받고 있는 주민들을 외면하고 체육관ㆍ안전센터 건설 등에 자금을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꼭 이주가 아니라도 오염 피해 주민을 지원하는 조례는 장점마을 사태 이후 전북 익산시에서만 뒤늦게 마련됐다.
이주도, 개발도, 환경개선도 어렵다?
지난해 3월 인천 서구청 관계자가 사월마을 주민들을 찾아왔다. “인천시에 도시개발 청원을 넣으면 마을을 도시화할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다.
주민들은 기대했다. 사월마을 김모(66)씨는 “도시개발이 성사되면 기존의 공장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환경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며 “토지수용 등으로 법적 보상금도 나오니, 이주를 원하는 주민들은 보상금을 받아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마을에 남고 싶은 사람들은 환경개선이 된 마을에 계속 거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도시개발법에 근거해 이주 문제를 검토하면 된다'는 환경부의 입장과도 맞닿아 있었다.
당시 마을에서 약 1.5㎞ 떨어진 곳에서 아파트 약 4,500가구가 분양을 앞두고 있었고, 이 아파트 시행사였던 건설업체 관계자들도 마을을 찾아 “지금 사업이 끝나는 대로 사월마을 개발에 힘쓰겠다”고 했다.
주민들은 구청의 적극적인 설득에 이주 요구를 철회하고 ‘인천시 북부권 종합발전계획’에 사월마을을 포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근 아파트 분양이 끝난 뒤 수개월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구청 관계자와 연락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당시 북부권 종합발전계획 연구용역을 담당하던 인천개발연구원까지 찾아갔다. 답변은 참담했다. "북부권 종합발전계획에서 사월마을은 제외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김씨는 “구청이 주민들에게 알리고 다시 이주 논의를 하거나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며 분노했다.
인천시의 또 다른 도시개발계획인 ‘2040 인천도시기본계획’에서도 사월마을은 제외됐다. 시 관계자는 이제 와서 “솔직히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역에 누가 아파트 단지 등 주거공간을 개발하려고 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또 “설사 이 지역을 개발한다 해도 기존에 있던 공장을 이전하려면 영업보상 등으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며 “시 예산만 가지고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시는 주민 이주 대신 마을 환경개선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해 8월부터 수도권매립지 인근 마을 12곳에 대해 ‘환경개선 대책 수립’ 용역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안에 사월마을도 포함됐다. 주민들은 “이미 200여 개의 공장이 들어선 지역의 환경을 개선한다고 해서 정주여건이 얼마나 나아지겠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부산시의 묘책, 그나마 머리 짜내
부산의 쓰레기매립장과 폐기물처리시설이 위치한 생곡마을 200여 가구는 2017년 시에 집단이주를 요청했다.
부산시는 다각도로 예산 확보에 나섰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날 때 지급할 법적 보상금 마련을 위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토지은행제도를 활용했다. 토지은행제도란 공익사업에 필요한 토지를 LH가 선제적으로 확보해 두는 대신, 토지수용 등에 필요한 보상금을 LH가 지급하는 제도다. 지자체 예산이 부족한 경우에 주로 활용된다. 부산시는 이 제도를 활용해 주민들에게 돌아갈 보상금 784억 원을 확보했다.
부산시는 향후 LH에 보상금을 분할 상환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토지은행제도는 아직 많이 알려진 제도가 아닌데, 이주대책을 세우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다가 해당 제도를 활용해 보기로 했다”며 “폐기물처리시설로는 전국에서 최초로 이 제도를 활용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시는 또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할 곳도 물색해줬다. 부산 명지2지구에 LH가 짓고 있는 아파트에 주민들이 입주할 예정이며, 분양가에 대한 협의가 진행 중이다.
생곡마을 주민들의 이주가 성사된다면, 이는 지자체의 아이디어로 이주대책을 마련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주대책은 중앙정부가 마련한 법률과 시스템이 아닌, 지자체의 임기응변에 기대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정부는 늘 연구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 환경부 관계자는 “인천 사월마을의 경우 다양한 대책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내년에 시작할 예정이며 동해항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선 이달 중 강원 동해시를 방문할 계획”이라며 “그 외에도 오염물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친환경 회복 및 복원’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국가가 버린 주민들
<2부>방치된 시스템
⑤유해물질, 운에 맡긴다?
⑥두 번 죽이는 조사 결과
⑦이주대책은 언제
⑧회한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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