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김결희 성형외과 전문의·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형외과 의사가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할 일이 있을까?'
내가 성형외과 전문의이자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라는 이야기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사실 성형외과는 두 가지 분야로 나뉜다. ‘미용 성형(Plastic Surgery)’과 ‘재건 성형(Reconstructive Surgery)’이다. 신체의 일부를 심미적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미용 성형이라면, 재건 성형은 질병이나 부상, 사고로 신체의 일부가 손상되거나 기능이 저하된 경우 그 부분을 정상의 상태로 되돌리는 수술을 뜻한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성형외과 의사의 역할은 ‘재건’에 해당된다.
나는 국경없는의사회를 통해 총 세 번의 의료지원 활동을 다녀왔다. 첫 활동은 2016년 중미의 아이티에서 총상?자상 환자를 주로 치료했고, 곧이어 두 달 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노마병’ 환자의 안면 재건 수술을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후 세 번째로 2018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주로 총상 환자의 하지 재건 수술을 했다.
매 활동이 소중한 경험이었고, 나에게 수술받은 환자 한 명 한 명이 기억에 남지만, 나이지리아에서 만난 한 노마병 환자가 했던 말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님, 저 이제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린 여자아이가 수술이 끝나고 나에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노마병’은 주로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서 나타난다. 세균성 질환으로 잇몸의 염증으로 시작되지만 점점 뼈와 조직을 파괴시키는데, 시작점에 따라 턱, 입술, 볼, 코 또는 안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초반 급성기 사망률은 90% 가까이 이른다. 10%의 확률로 생존하더라도 심한 안면 손상이 남기 때문에, 먹거나 말을 하거나 숨쉬는 것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환자는 평생 극심한 사회적 낙인을 겪게 된다.
내가 수술한 환자 중에는 입 주위의 피부가 녹아 이가 밖으로 그대로 드러난 상태라 무슬림 여성이 착용하는 ‘부르카’를 턱까지 올려 간신히 상처를 가린 환자도 있었다. 수술 후 나에게 말을 건 아이도 그간 가는 곳마다 손가락질당하고 차별받으며, 스스로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 그 아이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건, 아마 ‘나도 이제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의미였으리라.
노마병은 빈곤한 환경에서 사는 5세 미만 아동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열악한 위생과 영양 상태가 주요 원인이다. 한국이라면 항생제 처방으로 쉽게 치료가 가능하겠지만 의료서비스가 부족한 빈곤지역에서는 질병을 방치하다 심각한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영양실조를 앓고 있거나 구강 위생이 좋지 않은 경우, 홍역이나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 특히 노마병에 취약하다. 더욱이 당장 생계 유지가 급한 가정에서는 자녀 중 하나가 노마병에 걸리더라도 치료를 받지 않고, 오히려 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마병이 ‘가난의 얼굴(Face of Poverty)’이라 불리는 이유다. 의료 격차의 영향을 극명히 보여주는 질병이라 할 수 있다.
노마병 생존자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번에 걸친 복잡한 재건 수술을 받아야 한다. 조직이 없어져 볼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입을 열고 닫을 수 없는 환자, 눈꺼풀이 당겨져 있어 눈을 감지 못하고 결국 실명에 이르는 환자, 코가 없어서 코를 만들어줘야 하는 환자에 대한 재건 수술이 나의 역할이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노마병 환자에게 안면 재건 수술뿐 아니라, 수술 이후 사회로 복귀해 정상 생활할 수 있도록 정신건강 지원도 병행한다. 실제로 처음 나이지리아의 노마 병원에 갔을 때, 어두운 구석에서 늘 혼자 시간을 보내던 아이가 있었다. 노마병으로 인한 안면 손상 때문에 한 번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본 적이 없어 마음의 상처가 깊은 아이였다. 그 아이가 국경없는의사회를 통해 수술과 함께 정신건강 지원을 받고, 내가 활동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에는 또래 아이들과 해맑게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이 정말 삶의 변화를 겪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지만, 실제로 의료 서비스가 절실한 곳에서 진료를 하다 보면 환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구나’ '내가 가진 기술이 정말로 이들에겐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장에서 느끼는 보람은 내가 의사가 된 이유를 되새기게 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무력 분쟁, 전염병, 자연재해의 영향을 받거나 의료 서비스가 부족한 지역으로 가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치료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 대부분은 국경없는의사회가 아니라면 평생 치료의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국경없는의사회는 의료서비스가 전혀 없는 지역에서 병원을 짓고 운영하며, 의료진을 파견해 환자를 치료하고, 필요한 의료 물자를 들여오고, 지역사회와 협력해 예방 차원의 활동도 펼친다. 취약 지역의 환자에겐 한마디로 '희망'인 셈이다.
코로나19로 많은 국가에서 이동이 제한되고 의료자원이 부족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환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뉴스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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