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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옛 국토 대동맥 '영남대로'... 그 존재를 다시 알린 건 일본인유학생

입력
2021.10.02 11:0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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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김시덕문헌학자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17>서울-부산 도보길 영남대로, 서울 뱅뱅사거리에서 성남 금토까지



오늘은 서울시 남부의 교통 요충지인 양재역 부근에서부터 동남쪽으로 성남시 판교 부근 금토동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이 길은 전근대 시기에 영남대로라 불리던 간선도로였다. 한강 북쪽의 서울 사대문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오늘날의 양재동 부근에 있던 말죽거리를 지나 경기도·충청북도·경상북도·경상남도를 거쳐 부산에 다다른다. 영남대로는 전근대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던 길이었고, 당연히 잘 알려진 길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철도가, 그리고 현대에 고속도로가 도입되면서 영남대로는 잊히고 원형을 잃어갔다.

그러던 영남대로의 존재를 한국사회에 다시 알린 사람이 도도로키 히로시 선생이었다. 그는 한국의 대학원에서 지리학을 공부하던 1999년 도보와 대중교통으로 영남대로를 완주했다. 그의 책 '일본인의 영남대로 답사기'(한울, 2000)에는 20여 년 전의 영남대로 모습이 글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실려 있는데, 그 모습의 상당수는 그 후 사라졌다. 또한 그가 당시까지 영남대로를 기억하는 한국 시민들을 만나 수록한 증언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다시 수집될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 영남대로의 양재-금토 구간을 살피는 이유는, 현대 한국이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옛 도로가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희미하게 그 모습을 남기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과 서초구 양재동은, 1960~70년대의 영동 개발 과정에서도 영남대로가 살아남아서 뚜렷이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한편 양재동의 남쪽으로 이어지는 서울 서초구 신원동과 원지동, 성남 수정구 상적동과 금토동은, 그간 그린벨트로 묶여서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던 영남대로 주변 지역이 최근 들어 택지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반세기 전에 서울 강남에서 보이던 모습이 이 일대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이 일대는 영남대로와 주변의 경관이 비교적 옛 모습을 남기고 있었다. 그 옛 모습이 택지개발된 뒤에도 다소나마 유지될지, 아니면 서울 강남처럼 길의 형태만 남기고 사라질지 곧 판가름이 날 것이다. 현재로서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남대로의 이 구간 모습을 보여주는 두 장의 지도가 있다. 한 장은 1918년에 제작된 것이고, 또 한 장은 반세기 후인 1963년의 것이다. 한양·경성과 주변 지역의 확장이 동북-서남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양·경성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 주변의 경관은 이 두 장의 지도에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 후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영동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 지역의 경관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지만, 이 두 장의 지도와 현재의 위성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면 지금도 충분히 혼자 영남대로를 답사할 수 있다.

영남대로 마지막 흔적 뱅뱅사거리

서울 강남의 현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명이라고 하면 수도권 전철2호선 강남역 주변의 뉴욕제과, 9호선 삼성중앙역 주변의 (AID)차관아파트교차로, 그리고 3호선 양재역 주변의 뱅뱅사거리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뱅뱅사거리의 약간 북쪽에서부터 동남쪽으로 1㎞ 조금 넘는 구간에 영남대로가 포장도로의 형태로 남아 있다. 현재의 위성사진에서도 옛 영남대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블록이 형성된 강남 지역에서 뚜렷한 곡선을 남기고 있다. 바둑판 모양의 구획에서 어긋나는 이런 길은, 강남 개발 이전 농촌 시절의 영동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상방하교·하방하교 마을이 있던 강남역 동쪽 지역, 그리고 한티 마을이 있던 대치동 구마을 등에서도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싸리고개(왼쪽), 양재역의 말죽거리 비석

싸리고개(왼쪽), 양재역의 말죽거리 비석


1960~70년대 영동 개발이 워낙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다보니, 한강이 상류에서 실어온 흙이 평평하게 쌓인 지역만 개발해도 충분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서울 강남 지역은 상습적으로 침수하는 저지대이다 보니 마을이나 길은 언덕 위에 형성되었고, 이런 옛 마을과 길은 영동 개발에서 후순위로 밀린 것 같다. 도곡동·양재동의 옛 영남대로는 동쪽 매봉산의 중턱에 자리한 싸리고개를 통과하다보니 개발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도곡, 역삼, 말죽거리의 유래

싸리고개를 넘은 옛 영남대로는 양재역 사거리 동쪽을 통과해 남쪽으로 조금 더 이어진다. 양재역 사거리에는 현재 '말죽거리'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지만, 양재역은 싸리고개 근처의 언주초등학교에 있었고, 그 근처에 말죽거리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옛 농촌 마을의 어귀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위농협 건물이 있다. 1977년 지도에는 지금의 강남베드로병원 자리에 영동농협 건물이 표기되어 있다. 이 영동농협 도곡지점은 영남대로를 따라 약간 남쪽으로 내려온 자리에서 여전히 성업 중이다.

영동농협 옆에는 1978년에 준공된 양재시장 건물과 흥국연립이 남아 있다. 양재시장 건물 3층에는 말죽거리노인친목회·서초향우회 등의 사무실이 입주해 있어서 농촌 영동 시절의 강남 분위기를 전한다. 역시 영동 개발 초기의 분위기를 남기는 흥국연립은 현재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양재시장

양재시장


앞에서 소개한 1977년 지도에는 영동 개발 이전의 영남대로와 주변 마을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지금의 양재역 사거리가 아닌 3호선 매봉역 북쪽 도곡동, 즉 독구리 마을 자리에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도도로키 선생은 이곳의 노인정에서 옛 영남대로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얻었다.

"도곡동 독구리란 마을의 노인정에서 토박이 노인들에게서 옛날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주변에는 역이나 주막촌이 여섯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역삼동'이란 지명도 거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물론 이름 그대로 '말에 죽을 먹이는' 마방도 많았다. 영남대로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할아버지는 매일 대로로 다니며 다리내 고개 밑 성남시 옛골로 농사를 지으러 갔다고 한다."

이 노인이 농부로 활동하던 농촌 영동 시절에는, 영남대로가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서초구 양재동·신원동·원지동, 그리고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의 옛골을 잇는 간선도로로 기능하고 있었다. 현재 4432번 버스가 운행하는 노선이, 이 도곡동 노인이 농사지으러 다니던 길을 구현하고 있다.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과 양재 인터체인지를 지나면 다시 옛 영남대로가 나타나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동남쪽으로 향한다. 예전에 서초구 서초동이 서울의 남쪽 끝자락이던 시절에 유명하던 '꽃마을'이라는 지명과 화훼단지를, 지금은 이곳 서초구 신원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원동 미륵당과 느티나무

신원동 미륵당과 느티나무


서초구 신원동은 원지동이라는 지명과 쌍을 이룬다. 영남대로의 역원(驛院)이 원래 있었다고 해서 붙은 '원지동(院趾洞)', 그리고 역원이 새로 옮겨왔다고 해서 붙은 '신원동(新院洞)'이라는 것이다. 신원동과 원지동을 잇는 중간에는 미륵당과 백 수 십년을 산 느티나무가 서 있어서, 이곳이 교통의 요지였음을 실감하게 한다.

갈등 한복판에 놓인 새쟁이 마을

서울시와 성남시의 경계에는 새쟁이 마을과 옛골이 있다. 서울시에 속하는 새쟁이 마을에는 옛골텃밭농원이라는 이름의 농장이 있어서, 이곳이 두 지자체의 경계지역임을 확인시켜준다. 새쟁이마을에 있던 조선시대 인물의 묘비에는 13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동명연혁고 강남구'(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87)에 따르면 6·25전쟁 때 이곳에서 총살형을 집행한 흔적이다. 최근 새쟁이 마을을 답사했지만 묘비는 보이지 않았다. 묘비가 있다고 하는 주소지 바로 옆에 사는 주민도 묘비의 존재를 모른다고 한 것으로 보아, 무덤과 비석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새쟁이 마을에는 도로 확장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즐비하다. "새정이 마을 주민 죽이고 고가지선도로 만들어라!!", "평화로운 새정이 마을에 영업소가 웬 말이냐? 민간업자 배불리는 국토부는 해체하라!!!" 한국의 다른 모든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한적해 보이는 마을도 어김없이 갈등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서울과 성남의 경계를 이루는 옛골을 지나면, 아직 영남대로가 비포장 상태로 남아있는 새작골, 금현동, 달이내고개, 초가집·느티나무앞 같은 고즈넉한 이름의 버스정류장을 지나 금토동의 외동·내동마을에 다다른다.


광주군 대왕면

광주군 대왕면


금토동 외동마을과 내동마을은 그간 그린벨트로 묶여 있다 보니 옛 성남시의 경관을 잘 유지해 왔다. 정미소와 부속 건물, 금토동 종점 버스정류장 바로 옆의 1944년에 준공된 한옥 등은 성남시의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문화유산이다. 정미소에 부속되어 있는 기와집 문에는 성남시가 성립하기 전의 지명인 '광주군 대왕면'이라는 이름이 적힌 가옥조사표가 붙어 있어서 특히 귀중하다.

금토동 내동의 현재 모습

금토동 내동의 현재 모습

경부고속도로·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용인서울고속도로가 마을을 삼각형으로 감싸면서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성남금토공공주택지구·판교창조경제밸리·공공지식산업센터2차 등의 사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금토동 외동·내동 마을은 소멸 직전에 놓여 있다. 외동의 정미소와 부속건물은 조사를 거쳐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고 하지만, 내동의 1944년 준공 한옥은 이미 붕괴가 시작된 상태다.


금토동 외동 마을 초입의 영남대로 안내판

금토동 외동 마을 초입의 영남대로 안내판


대장동 스캔들 비켜간 금토동

영동개발 시기, 서울 서초구 양재동 등지에서는 수많은 유적이 파괴되고 도굴되었다. 2021년, 성남 수정구 금토동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그린벨트 정책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성남시의 옛 마을들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최근 성남 분당구 대장동의 택지개발사업을 둘러싼 스캔들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어 떠들썩하지만, 대장동에서 멀지 않은 금토동은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은 채 소멸하고 있다. 주민들의 이주가 거의 끝난 외동 마을의 초입에는 경기도에서 붙여 놓은 것으로 보이는 '경기옛길 - 영남길'이라는 안내 태그가 펄럭이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길과 마을을 기록하는 일은 언제나 쓸쓸하다.

글·사진=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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