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정재화 내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1975년 나는 서울 명동 백병원에서 인턴 수련 중이었다. 내과에서 인턴을 했던 그해 8월, 열다섯 살 소년이 식도와 위 출혈로 입원했다.
너무도 가난했던 소년은 초등학교만 마치고 취직을 해야 했다. 또래 친구들이 교복 입고 중학교에 다닐 때 소년은 철공소 직공으로 일했다. 퇴근 후면 어른 직공들과 회식에 참석하곤 했는데, 종종 강제로 주는 술을 마셔야 했다. 어느 날 얼굴이 불그스레해서 집에 돌아온 소년을 본 아버지는 뺨을 때렸고, 그는 순간 홧김에 부엌에 있던 농약을 마셨다. 농약은 식도와 위의 점막을 녹이는 화학적 화상을 일으켰고, 소년은 피를 토하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입원 열흘이 지나도록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치료비도 밀려 있었다. 내과 과장님은 일반외과에 수술 여부를 자문했는데 '불가'라는 답을 받았다. 그날 저녁 내과 과장님은 '빈사상태 퇴원'(moribund discharge)을 결정했다. 보호자도 동의했다. 이 열다섯 살 소년은 집에 가면 얼마 안 가 출혈로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열흘 넘게 굶고 있었다.
“엄마, 나 아욱국이 먹고 싶어.”
“그래, 집에 가면 엄마가 아욱국 맛있게 끓여 줄게."
모자의 얘기를 듣는데 눈물이 났다. 환자 진료기록은 퇴원 수속 때문에 원무과에 내려가 있었다. 과장님이 퇴근하자마자 나는 원무과에 가서 환자 차트를 다시 병실로 올려 달라고 했다. “퇴원 수속 정리를 다 해놨는데 왜 그러세요?”라는 직원의 물음에 난 “환자 상태에 변화가 생겨서 그래요”라고 둘러댔다.
환자 차트가 다시 병실 간호과로 올라왔다. 그런데 보호자는 그냥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난 소년의 형을 불렀다.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해 주겠다는데 왜 퇴원하려고 하세요?”
“치료비를 못 내면 도둑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집에 가려고 합니다.”
“도둑은 붙잡혀도 길어야 징역 3년입니다. 그런데 동생은 이대로 집에 가면 출혈로 죽게 돼요. 퇴원하지 말고 일단 계속 치료를 받으세요.”
나의 설득에 소년의 형은 계속 치료를 받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회진시간이 되었다. 내과 과장님이 소년을 보고 “어? 어떻게 된 거지?"라고 물었다. 레지던트도, 간호사들도 긴장했다. 내가 대답했다. “어제 과장님께서 퇴근하신 후 갑자기 출혈이 멎어서 제가 퇴원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침 회진 직전부터 다시 출혈이 있네요."
식도·위 출혈 환자를 치료할 때 코를 통해 고무줄관을 식도에서 위까지 집어넣고 투명한 수액줄을 연결한다. 이때 출혈이 있으면 수액줄을 따라 새빨간 피가 밖으로 배출된다. 그러니 출혈이 멎으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사실 소년은 출혈이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없다. 인턴이 과장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는데, 과장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난관은 또 있었다. 환자가 치료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약물이나 주사제를 처방해도 약국에서 약을 주지 않았다. 약 구하는 게 문제였다. 수백 명이 입원해 있는 종합병원에서는 아침 회진 때 의사 처방에 따라 주사를 준비해 뒀다가 환자 상태가 갑자기 변해 주사를 못 놓게 되면 폐기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각 층을 돌아다니며 당일 포장을 뜯은 변질 안 된 폐기약을 구해 소년을 치료했다.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콧줄을 통해 얼음찜질도 했다. 당직 아닌 날에도 병원에 남아 밤낮으로 소년을 돌보았다.
그렇게 또다시 열흘이 흘렀다. 그러나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빈혈이 심해져 수혈을 해야 하는데 치료비를 내지 않으니 병원에서 혈액을 사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병원 내 혈액실을 찾아가 피 한 병을 헌혈하고 환자에게 피 한 병을 수혈받게 했다. 그러자 레지던트도, 병동 간호사들도 헌혈하고 마지막에는 내과 과장님까지 헌혈에 동참했다.
그래도 위출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농약이 워낙 독해 식도와 위벽의 점막 손상이 광범위하고 깊었던 것 같다. 출혈이 멈추지 않으니 계속 수혈해야 하는데 어찌 피를 구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주한미군과 미군 가족을 치료하는 '121Hospital'이란 병원이 있었다. 그곳 군의관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혈액 좀 달라고 부탁했다. 보관일자가 3일 지난 혈액이 있는데 가져가겠냐고 해서 좋다고 했다. 혈액은 채혈 시 보관일자가 정해지긴 하지만, 보관만 잘하면 며칠 지나도 빈혈 치료용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혈액 다섯 병을 얻어 와 소년에게 수혈했다.
어느덧 입원 한 달이 다가왔다.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더 이상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정성이 통했을까, 얻어온 피 다섯 병을 수혈한 후 출혈이 멈추었다. 손상되었던 식도와 위 점막의 밑에서 새살이 자라나면서 출혈이 멎게 된 것이다. 소년에게 콧줄을 통해 우유를 먹이고, 며칠 지나 미음을 먹이고, 드디어 콧줄을 빼고 죽과 밥도 먹이게 되었다. 체중이 늘고 혈색도 좋아지고 건강도 되찾게 된 소년은 무사히 퇴원했다.(물론 소년은 병원비를 끝내 내지 못했고 병원은 결손처리를 했다. 건강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딱한 처지의 환자에겐 젊은 인턴 레지던트들이 야반도주를 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로 소년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50년 가까이 흘렀고, 소년은 지금쯤 60대 초반일 것이다. 의사 초년 시절 내가 가장 정성을 쏟았던 환자다. 가끔씩 그때 일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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