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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 10여 년 전에는 한국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따라야 한다더니 요즘엔 베네수엘라 꼴 날까 봐 걱정들이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중남미의 제대로 된 꼴을 보여 준다.
김동인의 단편 '감자'(1925). 주인공 복녀는 감자 몇 알을 훔치다 주인 왕서방에게 걸려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의 주인공 혜원은 어머니의 레시피를 따라 감자빵을 만든다. 복녀의 감자가 굴곡진 빈곤층의 삶을 대변했다면 혜원의 감자는 어머니의 사랑에 더해 빵의 식감을 달리해 줄 약간의 여유까지 가졌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미 안데스산맥으로, 스페인 탐험가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감자 덩굴을 처음 본 유럽 사람들은 해괴한 모양새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는 식물은 유럽의 농업 산업을 일으키고, 구황작물이 되고, 먹거리가 넉넉해진 시기 인구 증가에 기여, 유럽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자꽃을 너무 좋아해서 머리에 꽂고 다녔고, 남편 루이 16세는 단춧구멍 하나에 감자꽃을 넣는 유행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감자 농사를 장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독일로 건너간 감자는 독일을 대표하는 각종 감자요리로 변신했다. 1840년대 아일랜드에서는 감자잎마름병으로 들판의 감자가 모두 썩어 대기근이 일어났다.
어디 감자뿐이랴. 옥수수, 고추, 파파야, 아보카도, 고구마, 호박, 토마토, 아티초크 등 우리 먹거리의 상당수는 중남미에서 비롯됐다. 식민지 시절(15세기 중엽~19세기 초·중반) 식재료와 천연자원의 대서양 횡단은 국제교역의 시작이었다. 대서양을 건너 물적·인적 자원의 교류를 통한 세계화의 초석이 마련된 때였다.
그러나 정작 독립 후 중남미에는 크리올과 무기력함, 플랜테이션 농업형태, 그리고 제조업의 부재가 남았다. 유럽의 후손인 크리올들은 피부색과 계급을 무기로 엘리트층을 형성해 식민지 시절 정복자들의 역할을 대신했다. 자력으로 벽을 깰 수 없었던 원주민 인디오들은 무기력하게 자신들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식민지 시절의 농업형태는 계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식민의 유산 덕에 우리는 중남미산 커피와 사탕수수를 누린다. 유럽의 투자와 중남미 물자의 이동이라는 불평등한 교역 형태도 여전했다. 식민시기 행정구역 간 교류는 없었다. 유럽으로 천연자원을 나르기 위해 개발된 교통로는 정작 중남미 대륙 내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중남미 내 국가 간 협력이 어렵고 물류비가 비싼 이유다.
1492년 콜럼버스가 인도를 향한 첫 항해에서 과나하니섬에 도착해 산살바도르섬이라 이름 붙인 10월 12일은 유럽과 중남미의 만남이 이루어진 날로 기념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남미의 파리를, 우루과이는 중남미의 스위스를 표방한다. 칠레 남부와 브라질 남부의 몇몇 도시는 흡사 독일의 어느 시골 마을 같다. 멕시코, 에콰도르, 페루 곳곳의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분위기의 도시, 루브르 박물관을 따라 만들었다는 박물관은 또 어떠한가. 중남미의 식민시기는 아픈 과거도, 청산할 잔재도 아닌, 중남미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고 아직도 유럽은 상상 속 고향이다. 독립기념일은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 아닌, 그저 즐거운 명절이자 축제일 뿐이다.
원주민 인디오의 신화는 유럽인 사제들의 손을 빌려 기록되었다. 유럽의 유산도, 원주민 문화도, 우리 것이기도 아니기도 한 전통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대로 '상상의 공동체'. 여전히 혼란한 국가관과 정체성. 세상이 중남미에 진 빚이 많으니 자기 잘난 줄 알았으면 좋겠다. 중남미의 감자가 복녀의 감자가 아닌, 혼종 문화에 감칠맛을 더할 혜원의 감자가 될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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