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학교에서 출석을 부를 때 ‘지혜’라는 이름의 여학생은 많이 보았지만, 남학생은 없었다. 여자의 덕목으로 지혜를 높이 사는 전통 때문인데, 우리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꽤 글로벌하고 역사도 깊다. 한때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는 그 이름이 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 ‘소피아’에서 비롯되었다. 소피아 로렌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 자체가 여성형이고, 히브리어로 적힌 구약성서에서 지혜를 뜻하는 ‘호크마’도 여성형 명사다.
이처럼 지혜는 여성적인 것으로 여긴다. 용기나 힘, 권위와 같은 메리트가 주로 남성에게 적용되는 반면, 지혜는 유독 여성의 것으로 인류는 이해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이해가 고리타분하고 성평등에 어긋난다고 비판받을 것이다. 용기와 힘, 권위가 더는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년 전, 원시 사회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구약성서는 매우 가부장적이다. 물론 성서뿐만 아니라 인류의 오랜 고전들이 모두 그러하다. 흥미롭게도 성서의 잠언은 지혜를 ‘여성’으로 의인화(personification)하여 자주 언급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 안에서 말을 전한다.”(1:20-21). 여기서 지혜는 거리에서 소리를 외치는 한 사람으로 의인화되었고, 단어에 성별이 있는 원문으로 보자면 이 사람은 지혜라는 여자다. 이어지는 내용은 사람이 반드시 그녀의 말, 즉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성경은 이 지혜라는 여인을 매우 고귀한 존재로 묘사한다. 사람이 귀한 보석을 가지고 싶으면, “땅속을 깊이 파고들어가서, 땅속이 아무리 캄캄해도 그 캄캄한 구석구석에서 광석을 캐낸다.” 하지만 이 지혜만큼은 사람이 그 찾을 길을 알 수가 없고, 찾는다 하더라도 “금을 주고 살 수 없고, 은으로도 그 값을 치를 수 없다”고 한다(욥기 28:1-15). 그토록 지혜는 고귀한 여자라는 뜻이다.
잠언은 지혜로운 그녀를 어리석은 여자와 비교도 한다. 지혜라는 한 자애로운 안주인이 집에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다. 맛난 요리와 향기로운 포도주를 대접하고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유익한 조언을 한다(9:1-6). 뒤이어 어리석은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도 사람들을 초청하지만 이런 헛소리를 한다. “훔쳐서 마시는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다!”(9:13-17). 이 대조적인 비유를 읽으면서 잠언을 읽는 당시 청소년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참다운 삶의 윤리를 구하고 배워야 함을 알게 된다.
사실 고전을 구성하고 읽었던 이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자신들의 어머니와 할머니, 아내가 팔뚝 굵기로 밀어붙이는 남자들 틈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남자들을 조련(?)했는지, 그들은 이를 보면서 자랐고 이는 무의식에 각인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지혜는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할머니처럼 명철하며 아내처럼 영리했으며, 시바의 여왕처럼 매력적이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아이돌 스타였다. 지혜에게 마음을 빼앗긴 수많은 남자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나를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준다.”(8:17). 여기서 나는 지혜이며 동시에 절대자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왜 고대 이스라엘은 지혜를 이렇게 여자로 묘사했을까? 폰 라트라는 유명한 구약성서 학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혜는 인간에게 ‘그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녀’로 다가온다. 즉 어떤 가르침이나 교훈이 아닌 ‘인격’으로 여겨져야 하며, 이러한 인격의 지혜는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양식이고, 또한 인간에게 추구되고 싶으신 모습이다. 하나님은 신학 논문 속의 명제가 아니라 지혜롭고 매력적인 인격으로 사람에게 추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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