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개관한 아카데미 영화박물관]
94년 역사 미국 아카데미의 숙원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9년간 5,791억
지름 39m, 1만2,000톤 콘크리트 구(球)?
금빛 반원통 달린 82년 된 옛 백화점 건물 복원
피아노 "영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줘"
"좋은 건축, 인간에 감동 주는 무언가로 채워야"
편집자주
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여행이 있습니다. 세계 건축을 통해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살펴봅니다.
“제발 ‘데스 스타(Death Starㆍ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거대 전투용 인공위성)’라고 부르지 마세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비행선’이라고 불러주세요.”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LA)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Academy Museum of Motion Pictures)’ 개관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세계적인 건축가 렌조 피아노(84)는 이같이 간청했다. 최근 완공된 이 박물관은 영화 ‘스타워즈’의 ‘데스 스타’를 연상시키는 회색의 거대한 구(球)다.
1927년 설립돼 매년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ㆍ이하 아카데미)는 오랜 기간 영화 박물관 건립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부지 선정과 비용 문제 등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우여곡절 끝에 2012년 아카데미는 LA 월셔대로에 30만㎡(약 9만 평) 부지를 확보했다. 아카데미는 ‘퐁피두 건축가’ 피아노에게 박물관 설계를 맡겼다. 박물관 건립 비용은 4억8,400만 달러(약 5,791억 원)가 들었다.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0)는 “할리우드에 영화 박물관이 없다는 것은 매우 놀랄 일이었다”라며 “이제야 할리우드를 할리우드라 부를 수 있게 됐다”고 환영했다.
영화와 바다에서 영감
이탈리아 지중해의 항구도시 제노바 출신인 피아노는 ‘영화’와 ‘바다’에서 영감을 얻어 박물관을 설계했다. 그는 “영화와 바다는 ‘탐험’이란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무한한 바다 너머에 대해 항상 갈망해왔다면, 영화는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가준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 박물관이 마치 무한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으로 형상화되길 원했다. 지름 39m, 무게 1만2,000톤에 달하는 콘크리트의 구는 4개의 받침대 위에 살포시 얹혀 마치 공중에 뜬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유리가 가볍게 감싸고 있다. 창 하나 없는 콘크리트 내부는 1,000석 규모의 메인 극장이 있다. 피아노가 ‘고래의 뱃속’이라 부르는 이 극장의 내부 벽과 바닥, 좌석, 카펫은 붉은색으로 통일했다. 콘크리트 옥상과 유리 덮개 사이에는 LA 도심과 할리우드 언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휴게 공간이 마련됐다.
둥글게 유리로 구를 감싼 덕분에 박물관은 멀리서 보면 마치 도시에 살포시 내려 앉은 비누방울을 연상시킨다. 피아노는 “회색의 무거운 도시 한가운데 가벼운 비누방울이 내려 앉은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며 “영화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듯이 박물관도 도시의 꿈과 희망을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1998년 ‘건축계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피아노는 ‘하이테크 건축의 대가’로 꼽힌다. 최첨단 기술을 적극 활용해 경량 구조의 건축을 선보여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1977년)’, 일본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1994년)’, 미국 뉴욕의 ‘뉴욕타임스 본사(2008년)’, 영국 런던의 초고층 빌딩 ‘더 샤드(2010년)’ 등이 있다. 국내에는 서울 광화문 KT사옥(2015년)이 그의 작품이다.
이번 영화 박물관에도 최첨단 기술이 적용됐다. 지진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 특성을 고려해 네 개의 콘크리트 지지대로 구를 들어올렸다. 콘크리트 구는 대지에 붙어 있지 않아 오히려 지진 발생 시 충격을 덜 받는 구조로 설계됐다. 건축물을 살짝 덮은 아치형의 유리 덮개도 투명도가 높은 특수 이중 유리를 사용해 방수에 강하고, 주변의 빛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세계 최대 영화 박물관으로 변신한 82년 된 백화점
박물관은 크게 회색의 콘크리트 구와 1939년에 지어진 6층 규모의 옛 메이 컴퍼니 백화점 건물로 구성돼 있다. 피아노는 82년 된 기존의 건물을 고스란히 복원했다. 1930년대의 유선형 구조가 특징인 아르데코 양식으로 지어진 백화점은 외부 모서리에 금빛의 반원통이 박혀 있다. 피아노는 이 원통을 복원하기 위해 약 20만 개의 금박 모자이크 타일을 원산지인 이탈리아 제조업체에서 공수했다. 금빛 반원통에서 뻗어가는 건물 외관은 미국 텍사스산 석회암 패널로 갈아 입혔다.
내부도 원래 구조 그대로 복원했다. 장식과 천장을 뜯어내고 콘크리트 바닥과 기둥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전기 및 환기 시스템도 드러냈다. 기하학적이면서도 심미적인 당대 아르데코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최소한의 구조물만 남긴 82년 된 백화점은 곳곳에서 빛이 쏟아지며 세계 최고의 영화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구와 복원된 건물 중앙에는 긴 에스컬레이터가 배치돼, 두 건물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수직으로도 연결된다.
구와 기존 건물은 두 개의 고가 유리 통로로 연결된다. 피아노는 “방문객들이 1930년대 건물에서 새로운 구로 좁지만 투명한 통로를 통해 마치 빨려 들어가듯 넘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며 “이 경험은 마치 과거(백화점)에서 미래(구)로 여행 가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존 건물에는 전시 공간, 첨단 교육 스튜디오, 288석 규모의 극장, 상점, 레스토랑, 카페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마련됐다.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 전용 박물관이다. 영화 소품에서부터 세트장, 영화 도구와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영화산업을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박물관은 관객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피아노는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가 있어도 극적인 구성이나 적합한 대사가 없으면 영화로 만들 수 없듯이, 건축이 숨을 쉬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상상의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라며 “그것은 관객의 몫이며,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무언가로 채워졌을 때 좋은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이 행성들을 파괴하는 ‘데스 스타’로 불리기를 그가 꺼려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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