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10년 넘게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하고 있는 30대 여성입니다. 최근 번아웃을 겪으면서 글을 읽어도 내용 파악이 안 되고 마우스 스크롤만 내렸다 올렸다 반복하고 있어요. 병원에서는 쉬어야 한다는데 경제적 문제로 일을 그만두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회사로 이직한 건 1년 정도 됐어요. 출판사에 새로 편집자가 오면 기존 직원들이 꺼리는 원고를 맡게 됩니다. 업계에서는 '설거지한다'고 표현해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곳에서 마감한 책의 절반은 제가 작가처럼 자료를 다 찾아 쓰다시피 했어요. 원고를 파워포인트 문서(.ppt) 파일로 주는 저자, 자정에도 책과 관련 없는 넋두리를 쏟아내는 저자에게 시달리며 마감에 쫓겼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업무 효율이 급격히 떨어졌어요. 간단한 문서 작성도 더뎌지고, 컴퓨터 파일을 찾으려고 특정 폴더를 열었는데 '이 폴더를 왜 열었지?' 하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이런 상태가 부쩍 심각해져 밀려 있는 원고가 한가득입니다. 마음에 무형의 무언가가 있다면 지금 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럼에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를 부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를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 하지만, 눈이 잘 안 보이는 외할머니를 홀로 보살피는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부담이 제일 큽니다. 엄마에게 다달이 돈을 보내는데, 제 월세보다 더 많이 보내요.
엄마는 늘 '돌보는 사람'입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8년간 입원해 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찾아가 살피는 유일한 자식이었어요. 그렇게 하고도 장례식이 끝나고 조의금을 나눌 때 다른 형제보다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몸이 불편한 외할머니의 삼시 세끼를 혼자 챙기며 돌보세요. 엄마는 직장에 다녔는데, 결혼하고 아빠의 권유로 그만뒀어요. 제가 좀 크고 나서 사회 생활을 다시 해보려 했지만 잘 안 됐습니다. 엄마는 재취업을 위해 아빠에게 교육비 지원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어요. 지금은 파트타임으로 약간의 돈을 벌고 계세요.
저는 외동딸이고, 부모님은 제가 성인이 된 후 이혼하셨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 엄마가 아빠와 상의하지 않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그 계기로 둘 사이가 크게 틀어졌습니다. 이후 아빠는 엄마에게서 경제권을 빼앗아 갔고 입버릇처럼 '너네 엄마만 아니어도 더 좋은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라고 했어요. 물질만능주의, 돈밖에 모르는 아빠처럼 살기 싫다고 생각해 사춘기 때는 아빠와 눈도 안 마주쳤습니다. 아빠는 제가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가고도 재수를 결심하지 않은 데 대해 큰 실망감을 나타냈어요. 당시에는 상처가 됐지만 지금은 저도 나이가 들어 묻어 두고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저는 결혼 생활 약 2년 만에 이혼했습니다. 극심한 고부 갈등이 주 원인이었는데, 제가 엄마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도 갈등의 한 요인이었어요. 엄마께 생활비를 드리는 문제는 결혼 전에 남편과 다 의논한 상태였는데, 시어머니는 "친정 엄마 팔자 좋다"며 대놓고 못마땅해했어요. 얼굴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도 생활비만 남편과 공동으로 부담하고 나머지 돈은 각자 관리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얼마 안 돼, 직장에서 성희롱과 2차 가해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어요. 제가 당시 그 일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그러다 일을 그만두면 시어머니 간섭이 더 심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편은 일을 그만두라고 할 텐데, 일을 하지 않으면 시어머니가 엄마에게 돈 보내는 걸 더 뭐라고 하겠지'라는 생각에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버텼어요.
엄마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생활비 걱정 때문이셨는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안 된다고 극구 말리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엄마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도리를 다하는 동안 내가 무슨 일을 겪으며 돈을 벌고 있는지 아냐"고 따졌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엄마가 안됐고, 애틋한 마음이 들어요.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은진(가명·35·출판사 편집자)
은진씨, 인간에게 돈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사람에게 돈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중요해서 돈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관심이 없어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기도 해요. 누군가는 무관심을 넘어 돈을 혐오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은진씨에게 돈은 이 중 어떤 하나의 의미가 아닙니다. 은진씨는 돈에 대해 굉장히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은진씨는 기본적으로 돈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어요. 은진씨에게 중요한 인물인 엄마가 경제적 문제, 돈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 같아요. 은진씨 엄마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서 아빠와 사이가 틀어졌고, 아빠는 그걸 이유로 엄마의 경제권을 뺏었습니다. 엄마가 재취업을 위해 배울 게 있다며 지원을 요구했지만 아빠는 거절합니다. 그리고 엄마 때문에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못 갔다며 두고두고 타박했죠. 한마디로 아빠는 돈을 가지고 '치사하게' 굽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은진씨에게 돈이란 치사하고, 치졸하고, 과도한 통제 수단이자, 결과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반면 은진씨에게 돈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대상이기도 합니다. 은진씨 엄마는 선한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 같아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명분이 있으면, 좋은 의도라면 감당해 내는 사람입니다. 나이 든 부모를 묵묵히 돌보는 것도 본인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8년을 혼자 돌본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유산을 더 받겠다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은진씨 엄마입니다. 은진씨가 곁에서 지켜본 엄마는 선하고, 책임감 있는 좋은 사람입니다. 아빠처럼 내면이 아닌 돈이나 학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치사하게 굴지 않습니다. 이런 엄마가 앞이 안 보이는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선한 명분으로 지금 은진씨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죠.
엄마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마음이 따뜻한 은진씨는 이런 엄마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를 따르기에는, 월세보다 더 많은 돈을 엄마에게 꼬박꼬박 보내기에는 너무 버겁고 숨이 찹니다. 그렇다고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은진씨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선한 명분을 따르지 않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지요. 그래서 은진씨는 지금까지 헐떡거리며 어떻게든 엄마의 뜻을 따라왔지만, 본인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늘 지치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은진씨는 직장을 쉬거나 그만두는 문제에 대해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는 '돈을 못 벌게 된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둡니다. 내가 돈을 못 벌면 나는 엄마처럼 무시당하고, 과도하게 통제당하고, 그렇게 되면 자존심 상하고,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성희롱을 당했을 때도 이런 부당한 일을 겪으면 배우자에게 알리는 게 우선인데, 은진씨는 남편이 이를 알면 속상해서 회사를 그만두게 할 것이고, 그러면 돈을 못 벌어서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내 발언권이 더 줄어들 것을 먼저 걱정합니다. 은진씨는 결혼 생활을 할 때도 생활비를 어떻게 나누고 관리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아요.
은진씨는 모든 중요한 상황을 결국 돈과 연관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카섹시스(Cathexis)'라고 하는데요, 심리적 에너지가 어떤 특정 대상이나 관념, 생각 등에 집중되는 것을 말하지요. 은진씨는 모든 현상을 돈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이게 돈 대신 학벌이 되기도 하고 외모가 되기도 하고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은진씨가 돈만 아는 사람,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돈을 중요하게'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를 악물고 돈을 추구합니다. 반면 은진씨는 돈이 중요하고 필요하긴 하지만 동시에 돈을 미워하고 혐오해요. 사람을 치졸하게, 속물로 만드는 돈이니 이를 좇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버리면(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돈에 대한 태도가 양가적이라는 게 이런 의미예요.
은진씨가 묘사하는 상태로 추측하건대, 당신은 지금 생존에 필요한 정신적 에너지를 활활 태워서 재만 남은 상태예요. 번아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일 뿐이고, 문제의 근본은 돈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감정과 태도인 것 같아 보여요. 이런 내면의 불화를 해소하지 않으면, 쉬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해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돈을 바라보는 건강한 태도는 내가 돈을 다루며 사는 겁니다. 돈에 짓눌리거나 돈에 휘둘려 사는 게 아니라요. 자신이 버는 돈에 비해 과도하게 엄마에게 돈을 보내는 것도 돈에 눌려 사는 것이지요. 엄마가 고생하고 있고, 섭섭해해도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보내는 것이 돈을 다루고 사는 겁니다. 돈을 적게 보낸다고 해서 엄마를 저버리는 게 아니에요. '엄마, 저 그 정도는 능력이 안 돼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엄마에게 쏟아냈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도리를 다하는 동안 내가 무슨 일을 겪으며 돈을 벌고 있는지 아냐"는 말이 은진씨의 진심이니까요.
은진씨, 사연을 읽으면서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책임을 다하며 애쓰고 살아왔는지 느껴졌어요. 공감 능력이 좋아서 상대방이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딱 잘라내지 못하고 결국 들어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기억해야 할 건 누구를 돕든, 아무리 의도가 선하든 본인이 버겁다고 느껴질 만큼의 과도한 업무나 부담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는 거예요. 은진씨, 자기의 몸과 마음을 지킬 수 없는 상황까지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해 일을 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oh-counseling)를 통해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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