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BBK 의혹 소동은 정권 획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의 후진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때 울려 퍼지던 증오와 광기, 음모론의 악습이 극단적 진영 대결을 틈타 스멀스멀 다시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잠시 시간을 2007년 11월로 되돌려보자.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국내로 압송된 금융 사기꾼 한 사람에 의해 대선은 난장판이 됐다. 주가 조작, 횡령의 무대였던 BBK를 설립한 실소유주가 이명박 후보라는 김경준의 주장이 검증대에 올랐다. 선거는 막판까지도 ‘한 방이냐, 헛방이냐’는 구도로 흘러갔고, 여야의 고소ㆍ고발이 난무했다. 검찰이 대선 2주 전 이 후보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리자, 여당은 초유의 수사검사 탄핵안과 특검법을 발의했고 본회의장엔 쇠사슬과 전기톱이 등장했다.
결론은 허무하다. 이 후보가 BBK 실소유주임을 밝혀줄 것이라던 한글 이면계약서는 김경준이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김경준의 단독 사기극, 한국의 대선 상황을 악용한 허위 폭로극’이라는 사법적 결론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BBK 의혹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10년 만에 이뤄진 재수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법적 단죄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재수사에서도 이명박의 혐의에 BBK 의혹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스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BBK 의혹이라는 잘못된 조어는 지금도 정치권에 배회하고 있다. BBK든 다스든 이명박이 구속되면 된 거 아니냐는 논리 앞에 팩트를 들이미는 게 의미 없어진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BBK 의혹 소동은 네거티브 낙인찍기 효과가 얼마나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강력한 한 방의 유혹을 잊지 못해서일까. 이번엔 여야의 유력 대선 후보가 모두 피고발인 신분이 됐다. ‘BBK는 누구 겁니까’라는 선거 슬로건은 ‘화천대유는 누구 겁니까’라는 구호로 변주됐고, 야당 후보는 고발 사주 의혹으로 검찰과 공수처의 손에 정치적 운명이 달린 형국이다. 자신의 운명을 수사기관에 맡기는 ‘정치의 사법화’를 경계하자던 자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한술 더 떠 여당 내에선 ‘불안한 후보론’을 앞세운 초유의 경선 불복 사태가 내연하고 있다.
이미 정치권에선 “구치소에 가야 할 사람이 대선 후보가 되었다”거나 “헌정 파괴 국기 문란의 몸통이다”라며 의혹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면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와도 특검 공세를 이어가는 건 예정된 수순 같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는 게 우선이다. 사실과 증거 없이 의혹의 연기만 피우는 건 무책임한 태도다.
17대 대선에서 패배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BBK로 상징되는 네거티브 선거운동에 매몰되었다”며 공개 반성문을 발표했다. 상대 후보의 흠집에 의존해 반대급부를 얻어 보려는 쉬운 길을 택했다는 후회를 담았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번 대선은 포스트 코로나와 미중 갈등 같은 대전환의 시기에 국가 운명의 향방을 가르는 중대 선거다. 정책과 비전 승부 대신 네거티브 선거에 의존했던 과거 행태를 답습할 여유가 없다. '생태탕'과 '페라가모'만 남은 4월 재보궐 같은 선거는 이제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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