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캐치프레이즈가 동아시아 평화 정착입니다. 그러려면 민족 주체성을 살려야 하는데 어떤 민주 정부도 못 살리고 있어요. 국민들이 서포트(지원)해주지 않지요. 평화가 뭔지, 제국주의가 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의식의 격차가 빈부격차보다 더 큽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소공배수를 찾아보자. 진보는 진보세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수도 합리화하면 진보가 되고, 진보도 부패하거나 분열하거나 무능하면 보수가 된다. 그게 이 책의 이야기입니다. 국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13일 서울 중구의 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임 소장은 이달 펴낸 대담집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담집은 유성호 한양대 인문대 학장이 질문을 던지고 임 소장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임 소장은 1941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만 5세 때부터 한국사의 굴곡에 휘말린다. 1946년 대구 10ㆍ1항쟁에 삼촌들이 연루되면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역사와 평화, 민주화, 통일을 의미를 고민했던 임 소장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면서는 독재정권 아래서 필화사건과 간첩사건에 휘말려 두 차례나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담집은 임 소장의 삶을 따라가면서 한국 현대사를 수놓은 사건들과 인물들을 소환한다. 임헌영이란 인물의 자전적 기록이자 그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 한국 사회사인 셈이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함께한 유 학장은 “책에는 문학작품들을 비롯해 많은 문학인들, 정치인들, 역사가들, 사상가들이 나온다”라면서 “한반도의 역사를 식민부터 분단, 독재시절로 이어가면서 선생님의 의식이 개입해 풍요롭고도 개성적 해석을 읽어낼 수 있다. 문학비평가 임헌영의 한국 근대사 해석이기도 하다”라고 강조했다.
수많은 인물 가운데서 특히 강조되는 두 사람은 함석헌 선생과 리영희 교수다. 임 소장은 리영희 교수의 대담을 묶어서 2005년 ‘대화’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다. 임 소장은 “리영희 선생님은 ‘자기가 사회과학 해보니까 한국의 사회과학이 다 식민관계에 있더라’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라면서 “역사학에만 식민사관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정치, 사회, 문화, 교육까지도 다 식민화 돼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학이라면 서양 것이지 민족교육학이 없었다. 그것을 한국화한 것이 리영희이고 사상에서는 함석헌이다”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임 소장은 “나는 별 장점이 없는데 우리 시대를 올바르게 사는 선배들을 모실 줄 알았다”라면서 “제 언어만이 아니고 그분들의 입을 통한 언어를 제가 대신해서 대변해준 게 이 책”이라고 강조했다.
문학과 역사를 비롯해 한국 사회사를 가로지르는 대담을 기록한 만큼, 정치에 대한 비판도 나올 수밖에 없다. 임 소장은 1987년 6월항쟁 이후로 민주화 세력이 갈라지면서 아직까지도 진정한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불과 한 달 전에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이 있었던 자리를 방문해서 받은 충격을 털어놨다. 한 아파트 단지 정자 인근에 설치된 작은 철판에 ‘1990년 11월 폐쇄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수많은 방첩인들의 땀과 혼이 서려 있는 터로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이 표지석을 세운다. 2008년 7월 16일’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임 소장은 “이 내용을 보고 저는 민주화가 멀었구나(생각했다). 희생자는 없고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나라를 위해서 고생했던 거다(라고 쓰여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참여한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가 제시했던 ‘적폐 청산’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묻는 질문에 임 소장은 부정적 입장을 내놨다. 임 소장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빅토르 위고인데 그는 파리 코뮌이 일어났을 때 그 사람들을 집으로 피신시켜줬다. 빅토르 위고 한 사람만 그랬다. 당시 진보적이라던 사람들은 파리 코뮌을 다 외면했다”라면서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에 진보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나오는데 진보는 내일이다. 인류가 나아갈 길은 진보 밖에 없다. 진보 세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면 그게 다 진보세력이다. 보수세력도 잘하면 진보다. 진보세력이 무능하거나 부패하거나 분파주의가 되면 보수세력이 되는 거다. 그래서 진보가 어렵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임 소장은 “정치비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문재인 정권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의 모든 진보정권이 다 위기이고 실패했고 좌절했다”라면서 “제가 지적한 3개 중의 하나 때문이다. 무능, 부패, 분파주의. 소련처럼 권력을 단단하게 잡은 일당 국가도 무너졌다. 3개를 극복 못하면 진보도 보수가 되고, 사이비 진보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 학장은 “우리 사회에 역사의식의 격차가 있다는 것인데 임 선생님은 처음부터 (대담집이) 젊은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바랐다”라면서 “젊은 세대들이 이런 역사의 이야기에 지적 세례를 받았거나 경험적으로 뜨겁게 공감한 것이 적지 않나 싶다. 20년 전만 해도 앞 세대와 뒷 세대가 알아야할 지식의 격차가 적었는데 지금은 ‘필수 교양 필독서’ 개념에서 역사가 일탈하기 시작한 감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대담집이 역사의식의 격차를 좁히는 가교로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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