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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때도 정장 차림… 대니얼 크레이그는 진정한 본드였다 

입력
2021.10.15 06: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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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여러 영화 속 대니얼 크레이그의 모습.

여러 영화 속 대니얼 크레이그의 모습.

2006년 대니얼 크레이그를 만났다. 그는 지금처럼 큰 별이 아니었다. 출세작 ‘007 카지노 로얄’의 개봉을 막 앞두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신라호텔 한 객실에 들어갔다. 그는 회색 정장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넥타이는 연하늘색으로 기억한다. 야무진 매듭이 인상적이었다. 다가가니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20분 동안 그는 질문을 경청했고 신중하게 답변했으며 그러는 동안 내 눈을 마주보려 했다. 왼쪽다리를 꼰 채였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턱을 자주 받쳤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좋은 성과 얻기를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내내 진지하던 그가 반짝 웃었다. 그를 만나기 전, 만난 이후 정장을 입고 인터뷰 자리에 나타난 국내외 배우는 단 한 명도 없다. 돌이켜보건대 크레이그는 스크린 밖에서도 제임스 본드의 품격을 보이고 싶었나 보다.

그가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낙점됐을 때만 해도 우려가 컸다. 이전 본드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키가 크지 않은데다 지나치게 다부져 보였다. 무엇보다 금발이었다. 누구나 알 만한 스타가 아니었으니 “왜 캐스팅했냐”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로저 무어=제임스 본드’로 알고 자란 세대인 나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본드는 능글능글하면서도 질척거리지 않고 낭만적인 남자라고 생각했다. ‘전투형’ 크레이그는 그런 고정관념과는 멀고도 멀었다.

'마더'는 대니얼 크레이그를 제임스 본드로만 아는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영화다. 영화사 진진 제공

'마더'는 대니얼 크레이그를 제임스 본드로만 아는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영화다. 영화사 진진 제공

‘007 카지노 로얄’ 이전 ‘툼 레이더’(2001)와 ‘로드 투 퍼디션’(2002), ‘마더’(2003), ‘뮌헨’(2005)으로 그의 얼굴을 익혔다. 당시 쌓인 그에 대한 인상은 충동적이고 다혈질이며 거칠어 보인다는 거였다. ‘로드 투 퍼디션’에서 그는 마피아 두목의 아들 코너를 연기했다. 코너는 화를 못 이겨 문제를 키우는 인물이었다. 평소 질시하던 동료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가하는 야비함을 지니기도 했다. ‘뮌헨’에서 그가 연기한 이스라엘 비밀 첩보원 스티브는 매사에 용수철 튀듯 반응했다. ‘마더’에서 그가 표현한 대런은 어떤가. 그는 유부남인데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의 어머니와 충동적으로 관계를 맺고선 사랑에 빠진다. 강렬하면서도 쓸쓸함과 허무를 함께 담은 그의 눈은 절제나 현명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했다. 그는 실패한 본드가 될 거라고 예단했다.

크레이그는 ‘007 카지노 로얄’ 이후 새로운 본드 이미지를 만들었다. 크레이그표 본드는 향수 향보다 땀 냄새가 더 났다. 그는 이전 선배 본드들보다 더 많이 구르고 뛰고 숨가빠했다. 정장보다 작전복을 더 자주 입었다. 무지막지한 고문 등 역경을 힘겹게 이겨내는 장면을 많이 선보였다. 이전 본드가 바람둥이 기질이 강하고 첨단무기에 의존하는 비현실적인 첩보원이었다면, 크레이그의 본드는 현실에 있음직한, 냉혹한 현장 요원이었다. 2012년 ‘007’ 시리즈 탄생 50주년을 맞아 ‘007 스카이폴’이 개봉했을 때 영국에 있었다. 국가 행사처럼 곳곳에서 기념행사를 했고, 영화 포스터가 이곳저곳 붙어 있었다. 여자들이 포스터 속 그의 단호한 얼굴 표정과 단단한 몸을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남자야(He Is Man)!”

대니얼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로 낙점됐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려를 샀다. 하지만 그는 15년 동안 본드로 살았다.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대니얼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로 낙점됐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려를 샀다. 하지만 그는 15년 동안 본드로 살았다.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크레이그는 예상을 깨고 장수 본드가 됐지만, 오래전부터 ‘007’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네 번째 ‘007’ 출연작이었던 ‘007 스펙터’(2015) 개봉 즈음 더 이상 본드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본드 연기를 또 하느니 손목을 (칼로) 긋겠다”는 과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만일 또 ‘007’에 출연한다면 돈 때문일 것”이라는 독한 말을 곁들였다. 에스프레소 두 잔을 한 번에 들이켠 후 하루를 시작한다는, 직설적이고 즉각적인 그답다고 할까. 그는 본드 이미지를 털고 자유롭게 여러 연기를 펼쳐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크레이그는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제작사 MGM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지난달 개봉한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그의 마지막 본드 연기가 됐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그의 퇴장을 알리는 동시에 다음 본드가 여성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비장한 결말은 로맨틱하기보다 우수 어린 그의 눈빛 때문에 비감이 더 짙다. 나에게 진정한 본드는 크레이그로 기억될 듯하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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