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이스크림의 통사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격주 토요일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불타는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며 네로는 과연 어떤 시를 읊었을까? 불이 뜨거우니 혹시 시원하고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대한 시는 아니었을까?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 무려 9일 동안 로마 시내 14개 구역 가운데 10개 구역에서 벌어졌던 대화재인 만큼 아이스크림이 '살살' 녹았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냉동·냉장 기술을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서기 64년이었으니 아이스크림이 오래 버텼을 리도 없다.
아이스크림이 버티기는커녕 존재는 했을까? 네로의 로마 시내 방화설이나 만년설을 활용한 아이스크림의 기원설 모두 흥미진진하지만 신빙성은 매우 떨어진다. 물론 네로는 희대의 폭군이었고, 로마의 대화재를 빌미로 기독교도를 학살했다. 하지만 그런 그마저도 시상을 얻기 위해 로마에 방화를 저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이 네로의 시대에 존재했다는 근거도 희박하다. 노예를 시켜 채취해온 만년설을 네로가 과일 등과 섞어 먹은 게 최초의 아이스크림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얼려야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다 보니 기원설에 만년설이 습관처럼 딸려 다닐 뿐이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고 심지어 네로를 지우더라도 만년설은 사라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탈리아 남단의 시칠리아 섬, 특히 팔레르모가 아랍의 통치를 받으며 성장했었던 시절 유입된 음료 샤르바트(sharbat)를 근처 에트나 산 꼭대기의 만년설로 얼려 먹었다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 한술 더 떠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전진기지 삼아 인공 냉동 기술을 발명했다거나 마르코 폴로 이전에 중국에서 기술을 들여왔다는 주장도 있다. 전부 근거가 없다.
온도를 낮춰야 하는 건 확실하지만, 아이스크림의 탄생에는 만년설이 아닌 흡열 효과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얼음에 소금을 더하면 차가운 곤죽으로 변하며 0도 이하로 떨어지니 다른 액체의 열을 빼앗고 결국 얼리게 된다. 흡열 효과는 고대 인도의 설화집 판차탄트라에서 처음 언급된 바 있지만, 실제 사용 기록은 1600년대 후반~1700년대 초반부터 존재한다. 아이스크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셔벗(Sherbet, 프랑스어 소르베·Sorbet)나 그라니타(granita)에 활용한 것이다. 금방 녹아 사라지는 탓에 별식 가운데 별식이었던 아이스크림은 1870년대에 본격적인 돌파구를 찾는다. 독일의 엔지니어 카를 폰 린데가 냉동 기술을 개발해 얼음 저장의 부담을 덜어내고 대량 생산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1926년, 냉동고의 출현으로 현대적 생산 공정에 돌입했다.
아이스크림의 역사와 분류
아이스크림의 역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 갈래는 재료의 역사이다. 아이스크림의 원형인 셔벗이나 그라니타는 과일즙이나 꽃향기를 머금은 물, 술 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순수한 얼음 알갱이었으니 시원하되 서걱거렸다. 이들에 우유나 크림을 더함으로써 부드러움이 제자리를 잡았고 오늘날의 이름 '아이스크림'을 얻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의하면 얼린 크림(Iced Cream)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88년이다. 1672년에는 영국의 왕 찰스 2세의 판결문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1744년, Iced Cream이 편의상 'Ice Cream'으로 자리를 잡았다.
유제품 첨가 아이스크림은 계란 노른자의 유무 여부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계란 노른자를 쓰지 않고 우유와 크림, 설탕만으로 만드는 아이스크림을 필라델피아식이라고 일컫는다. 이미 18세기 말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목요일 정찬에 종종 등장할 정도였고, 1876년의 필라델피아 대박람회를 통해 널리 퍼져 붙은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1974년에 등장한 아이스크림 투게더가 바로 대표적 필라델피아식 아이스크림이다. 한편 계란 노른자를 쓴 아이스크림은 프랑스식으로 분류한다. 계란 노른자의 단백질과 유화제인 레시틴 덕분에 유지방 함량이 낮고 수분 비율이 높아도 부드럽다.
아이스크림 역사의 두 번째 갈래는 냉동 기술을 포함한 제조 기술의 발전 과정이다.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은 베이스가 얼면서 생기는 얼음 결정의 크기에 달렸다. 액체를 얼렸음에도 아이스크림이 부드러운 이유는 얼음 결정의 크기가 자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스크림 제조 및 보관 과정 전반에 걸쳐 얼음 알갱이를 작게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설탕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흡열 효과와 같은 원리로 설탕이 베이스의 어는 점을 낮춰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에 일조한다. 설탕 덕분에 베이스의 최대 5분의 1에 이르는 수분이 최저 영하 18도에서 얼지 않고, 냉동 과정에서도 저어 불어넣는 공기와 함께 조직 전체를 느슨하게 엮어준다.
아이스크림의 오버런과 소프트 아이스크림
한편 얼음 결정의 크기만큼이나 원액과 공기 비율 또한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같은 무게의 베이스에 불어넣는 공기의 양에 따라 아이스크림의 부피 및 부드러움의 정도가 달라진다. 이 원액과 공기 사이의 비율을 '오버런(overrun)'이라고 일컫고 부드러움의 척도로 삼는다. 예를 들어 오버런이 100%라면 원액과 공기의 비율이 1대 1이라는 의미다. 오버런 수치가 낮을수록 밀도가 높아 아이스크림이 뻑뻑해지고, 높을수록 밀도가 낮고 부드러워진다. 오버런 수치가 높을수록 공기 또한 많이 먹는 셈이니 부드럽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오버런 수치가 높을수록 아이스크림이 빨리 녹아 맛의 여운 또한 짧아진다.
부드러움을 극대화한 종류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으로, 오버런 수치가 60%에 이르기도 한다. 미국의 아이스크림 제조업체 '카벨(Carvel)' 홈페이지의 기업사에 의하면, 1934년 창업주인 톰 카벨이 구멍 난 타이어 때문에 주저앉은 트럭에 담겨 녹는 아이스크림을 판 것이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시초라고 한다. 일반 아이스크림(영하 15도)보다 높은 제조 및 유통 온도(영하 4~6도)가 이름처럼 유별난 부드러움의 비결이다.
세계의 아이스크림
비록 야사이지만 시칠리아와 아이스크림 기원설이 얽혀 있어 그런지,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 문화는 다채롭다. 만년설과 상관없이 시칠리아가 고향인 그라니타는 공기를 불어넣지 않고 만들어 우리의 빙수와 흡사하다. 실제로 과일즙 등을 단단하게 얼려 빙수처럼 갈거나, 아니맨 냉동실에 넣고 매 30분마다 표면에 낀 살얼음을 잘게 부숴 만든다. 한편 '로마의 휴일' 등의 고전 영화에서 존재감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대표 아이스크림 젤라토(Gelato)는 그 이름 자체가 '얼렸다'는 의미다. 젤라토는 여느 아이스크림에 비해 유지방 비율이 낮은 대신 상쇄하기 위한 설탕의 비율이 높다. 그 결과 오버런이 20~35%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낮아 밀도 또한 높다.
프랑스에서도 아이스크림은 글라세, 즉 '얼음'으로 통한다. 계란 노른자를 바탕으로 만든 커스터드(또는 크림 앙글레즈)를 얼리면 글라세가, 유지방을 더하지 않은 과일즙 등을 얼렸을 경우에는 소르베가 된다. 높고 좁은 잔에 생크림과 음료, 과일 등을 켜켜이 담고 일본식 모형의 우산을 꽂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페 음료 '파르페'는 사실 저어 공기를 불어넣지 않고 얼려 단단한 아이스크림을 의미한다. 한편 인도를 비롯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등의 남아시아 지역에는 쿨피(Kulfi)가 있다. 우유를 천천히 졸인 연유로 만드는데, 틀에 넣어 굳혀 '하드'라 부르는 '○○바' 류의 아이스크림과 비슷하다. 아랍의 디저트 팔루데(Faloodeh) 또한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가는 당면에 설탕과 장미수의 시럽을 섞어 얼린, 아이스크림의 시초격이다.
오늘날의 아이스크림
애초에도 최첨단 음식이기는 했지만 오늘날에도 아이스크림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얼리는 시간을 줄이는 한편 좀 더 부드러운 질감을 갖춰 주려는 수단이 개발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게 액체질소이다. 어는 점이 영하 210도로 아주 낮아 베이스를 순식간에 얼릴 수 있다. 얼음 결정이 커질 겨를 조차 없이 빨리 얼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이 몇 갑절은 더 부드러우면서도 밀도가 높고 신선하다. 또한 온도가 워낙 낮아서 제조기를 재냉각할 필요가 없으므로 아이스크림을 즉석에서 만들 수도 있다. 제과제빵에 쓰는 믹서에 베이스를 돌려 공기를 불어넣는 가운데 액체질소로 급속 냉각시킨다.
또 다른 수단은 파코젯(Pacojet)이다. 스위스 태생의 엔지니어 빌헬름 모러(Wilhelm Maurer)가 발명한 파코젯은 연마(硏磨)를 통해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영하 22도 이하의 온도에서 아주 단단하게 얼린 원액을 2,000rpm의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칼날이 2㎛의 초미세 입자로 갈아낸다. 그 결과 통상적인 기계로는 얻기가 불가능한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밀도가 높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낸다. 특히 셔벗처럼 지방을 첨가하지 않은 종류를 어는 점을 낮추기 위한 설탕 없이도 일반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매끈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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