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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휴대폰 쓰는 北청년들... '뒷바라지 싫어' 비혼주의 여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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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휴대폰 쓰는 北청년들... '뒷바라지 싫어' 비혼주의 여성도"

입력
2021.10.15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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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남편과 2년 북한살이, 린지 밀러
에세이 '비슷한 곳조차 없는' 출간

북한살이 2년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비슷한 곳조차 없는'의 작가 영국인 린지 밀러는 "북한에서 국영방송이 보도하는 성명서의 번역본을 읽으며 '북한이 (무기를 만들어)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남한과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 아닌가'란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게 돼 잠시 북한을 떠난 적이 있다"고 했다. 밀러 제공

북한살이 2년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비슷한 곳조차 없는'의 작가 영국인 린지 밀러는 "북한에서 국영방송이 보도하는 성명서의 번역본을 읽으며 '북한이 (무기를 만들어)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남한과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 아닌가'란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게 돼 잠시 북한을 떠난 적이 있다"고 했다. 밀러 제공

"우르릉!" 뮤지컬 감독이자 작곡가인 영국인 린지 밀러는 땅에서 깊은 울림이 느껴지고 둔탁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폭풍이 오는 걸까. 침대에 내려와 집 밖으로 나가 보니 낮게 날아오르는 비행기 소리가 공기를 찢는 듯했다.


태평양으로 발사된 탄도미사일, 그날

때는 2017년 8월. 북한이 태평양 앞바다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날이었다. 초록 눈의 외국인인 그는 당시 평양시 동부 문수동에 살았다. 밀러는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다. 북한 주민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북한살이 2년을 기록해 지난달 낸 책 '비슷한 곳조차 없는'(인간희극)에서 밀러는 예상과 달리 당시 주민은 큰 동요가 없어 놀랐다고 썼다. TV 뉴스에 미사일 발사 관련 소식은 한 토막도 나오지 않았고, 평양 시내는 여느 때처럼 출근 인파로 붐볐다. 최근 본보와 이메일로 만난 밀러는 "북한에 있는 동안 몇 차례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이 있었지만, 위성 TV를 통해 제공되는 글로벌 뉴스에 보도되기 전까지 미사일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항상 제때 알지 못했다"며 "마치 태풍의 눈에 있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북한 젊은 남녀가 평양의 일간 로동신문 사옥 앞을 손잡고 걸어가고 있다. 밀러 작가는 '비슷한 곳조차 없는'에 '공공장소에서의 애정 표현은 젊은이들 사이에선 점점 일상이 돼 가고 있다'며 '도전하는 신세대가 늘어나고 있다'고 썼다. 작가가 2018년 8월 찍은 사진. 밀러 제공

북한 젊은 남녀가 평양의 일간 로동신문 사옥 앞을 손잡고 걸어가고 있다. 밀러 작가는 '비슷한 곳조차 없는'에 '공공장소에서의 애정 표현은 젊은이들 사이에선 점점 일상이 돼 가고 있다'며 '도전하는 신세대가 늘어나고 있다'고 썼다. 작가가 2018년 8월 찍은 사진. 밀러 제공

밀러는 외교관인 남편과 함께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북한에서 지냈다. 오토 웜비어 등 외국인이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돼 비참하게 처벌받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서로를 도발한 일촉즉발의 시기였다. 오랜 고민 끝에 린지는 "내 눈으로 북한을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라 생각해 북한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북한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북한에선 군인들이 무료 노동력으로 건설 현장에 자주 투입된다고 한다. 밀러 작가 제공

북한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북한에선 군인들이 무료 노동력으로 건설 현장에 자주 투입된다고 한다. 밀러 작가 제공


"무엇이 진짜고, 가짜지?" 마법 풀기

기대는 곧 산산이 부서졌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게 매일 숙제처럼 주어졌다. 깨끗한 병원엔 환자가 없고, 학교엔 학생이 없었다.

품격은 때론 사치였다. 같은 단지에 사는 외교관들은 코코넛 워터 가게 정보를 두고 싸웠다. 소문이 나면 물건이 금세 동이 날까 봐 한 외교관이 입을 다물어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에 살면서 마치 자신들이 현지인이 된 것처럼 북한 정보 관련해 서로 공개를 꺼리고 비밀스럽게 거래하려는, 이상한 변화를 그는 '평양 효과'라고 표현한다. 밀러는 "그렇게 싸우는 외국인들이 너무 창피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북한 주민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며 "북한에 살면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됐다"고 답했다.

그는 북한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로 '고립감'을 꼽았다. 외교단지엔 무장한 군인들이, 집 밖으로 나가면 또 다른 감시인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 현지 주민들과 지속해서 교류를 맺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북한 평양에서 메스게임을 관람하다 셀카를 찍는 젊은 여성들. 밀러 제공

북한 평양에서 메스게임을 관람하다 셀카를 찍는 젊은 여성들. 밀러 제공


"남한 가수 노래 화면 자막 보고 이해"

밀러에 따르면 북한은 여전히 공포와 통제로 유지되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변하고 있다. 손을 잡고 거리에서 데이트하는가 하면, "게으른 남편이랑 종일 울어대는 애들 뒷바라지하면서 좋은 시절 다 보내기 싫다"는 여성도 만났다. 삼성이나 애플의 휴대폰을 사용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고, 술집에서 어떤 여성은 캐나다 팝스타 셀린 디온의 '마이 하트 윌 고 온'을 불렀다. 밀러는 "평양 커피숍엔 공식 브랜드는 아니지만 스타벅스 메뉴도 있었다"며 "글로벌 소비문화에 대해 예상외로 많이 알고 있었다"고 신기해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8년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우리 예술단 공연 '봄이 온다'를 관람한 뒤 그룹 레드벨벳과 이야기하고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8년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우리 예술단 공연 '봄이 온다'를 관람한 뒤 그룹 레드벨벳과 이야기하고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2018년 '봄이 온다'를 주제로 평양에서 열린 우리 예술단의 공연엔 밀러도 참여했다.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눈 한 북한 관객은 '남한 가수의 노래를 듣고 이해하기가 어려워 화면에 자막이 나오는 게 다행'이라고 하더라"며 "남과 북의 가수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걸 지켜보는 순간이 제일 뭉클했다"고 공연 후기를 들려줬다. 밀러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북한 친구는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하나"란 구호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북한 남포해변에 현지 주민들이 수영복을 입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밀러 작가 제공

북한 남포해변에 현지 주민들이 수영복을 입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밀러 작가 제공


밀러는 북한을 떠날 때 처음엔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분노와 좌절, 슬픔 그리고 죄책감과 감사 등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왔지만 "거기서 만난 친구들을 다시는 볼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밀러는 북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 한 노인과의 짧은 만남을 들려줬다.

"제게 먼저 다가온 할아버지가 어린 소녀를 담요에 쌓아 안고 있었어요.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우린 사랑스러운 대화를 나눴죠. 그러다 내게 이제 떠나라는 듯 손을 젓더라고요. 뒤돌아보니 한 남성이 우릴 지켜보고 있었죠. 그렇게 만난 북한 사람들이 마음에 남아요. 제가 사람한테 집중해 이 책을 낸 이유이기도 하고요."

'비슷한 곳조차 없는' 영문판 표지. 밀러 작가 제공

'비슷한 곳조차 없는' 영문판 표지. 밀러 작가 제공


'비슷한 곳조차 없는' 한국판 책. 인간희극 제공

'비슷한 곳조차 없는' 한국판 책. 인간희극 제공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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