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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무슬림 테러의 논쟁적 첫 장을 열다

입력
2021.10.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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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adi Yacef(1928.1.20~2021.9.10)

알제리 전쟁(1954~62)의 56,57년 도심 테러 전쟁을 재현한 질로 폰테코르보의 1965년 영화 '알제리 전투'의 한 장면. 사디 야세프(왼쪽 두 번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전투책임자로 테러 전쟁을 지휘했고, 회고록으로 시나리오의 바탕을 제공했고, 제작자로 영화를 만들게 했고, 엑스트라로 직접 출연했다. 영화는 6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탔지만, 프랑스 당국은 고문 사실을 부정하며 5년간 국내 상영을 금지했다. British Film Institute 사진

알제리 전쟁(1954~62)의 56,57년 도심 테러 전쟁을 재현한 질로 폰테코르보의 1965년 영화 '알제리 전투'의 한 장면. 사디 야세프(왼쪽 두 번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전투책임자로 테러 전쟁을 지휘했고, 회고록으로 시나리오의 바탕을 제공했고, 제작자로 영화를 만들게 했고, 엑스트라로 직접 출연했다. 영화는 6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탔지만, 프랑스 당국은 고문 사실을 부정하며 5년간 국내 상영을 금지했다. British Film Institute 사진


이라크 전쟁(2003.3~2011.12) 개전 직후인 2003년 9월 미 국방부는 파병 장교와 백악관 안보보좌관실 관계자 등 40여 명을 모아놓고 영화 한 편을 단체 관람했다. 또 이례적으로 그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초대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프랑스는) 어떻게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이념 전쟁에서 패배 했는가.(...) 이 영화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다.” 이탈리아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의 1965년 영화 ‘알제리 전투(Battle of Algiers)’였다.

영화는 130년 프랑스 식민치하 알제리인들이 벌인 독립전쟁(1954~62) 중 농촌-산악 게릴라전투가 아닌 56, 57년 수도 알제에 집중된 테러와 보복테러, 체포- 고문과 살인-진압의 양상을 다뤘다. 네오리얼리즘 거장 폰테코르보는 뉴스 화면을 편집한 것 같은 흑백 다큐 기법으로 저 영화를 촬영했고, 출연진도 단 한 명을 뺀 전원을 일반 시민과 여행자로 채웠다.

이탈리아 공산당원이던 좌파 감독이, 테러 주체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LF, 프랑스어로는 FLN) 전투 사령관의 회고록을 토대로 만든 시나리오로, 독립 직후 알제리 자본을 들여 만든 영화였다. 하지만 폰테코르보는, 군인들의 고문 장면뿐 아니라 NLF의 냉혹한 테러 양상, 예컨대 유럽 민간인 여성-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희생시킨 여성들의 폭탄테러 장면까지 여과없이 담았고, 테러- 고문의 논리와 심리까지 파헤침으로써 값싼 선전 영화의 함정을 벗어나 폭력과 해방, 야만과 휴머니즘이라는 본질의 틈새로 돌진했다. 영화는 66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당국은 고문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영화의 국내 상영을 5년간 금지했다.

테러-반테러의 교과서가 된 영화

영화는 미학적-예술적 평가와 별개로 도구적-이데올로기적 도구로도 각광받았다. 60년대 미국 대학가 반전-급진주의 활동가들이 저 영화를 필수교재처럼 활용했고,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블랙팬서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근년의 알카에다 등 수많은 (준)테러단체들이 조직원들의 적개심과 투지를 돋우고 고문-테러의 기술적 기초를 전수하며 테러활동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막 시작한 미국 정부가 영화 단체관람 사실을 공개한 까닭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정말 정부가 영화를 통해 뭔가를 배우고자 했다면, 훨씬 상위 권력자들이 은밀히 저 이벤트를 벌였을 것”이라며 모종의 노림수를 의심했다. 꼬집어 밝히진 않았지만, '노림수'란 테러의 잔혹성과 테러범에 대한 고문의 불가피성 등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정서적 충격 완화를 위한 일종의 백신이었을 것이다.

사디 야세프(Saadi Yacef)는 도심 테러의 지휘자인 알제자치지구 NLF 게릴라 사령관이었고, 영화 시나리오의 원작인 '알제전투 회고록(Souvenirs de la Bataille d’Alger)’을 쓴 작가였고, 감독을 섭외하고 제작비를 댄 영화 제작자였고, 직접 출연까지 해서 자신(El-Haadi Jaffar역)을 연기한 배우였다. 다시 말해 그는 해방전쟁의 분수령이 된 56~57년의 알제 테러의 주역이자 영화의 숨은 주역이었다.
폰테코르보의 성취에 가려져 있던 그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원작 필름이 고화질 영상으로 복각된 2004년 무렵이었다. 그는 후세대가 자신들의 삶과 활동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주길 바랐다고, 자신들의 테러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슬람원리주의자들에 의한 '알제리 내전' 테러에 대해서는 "NLF의 테러와 방식만 닮았을 뿐 동기도 지향도 전혀 다르다"고, "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무슬림 테러 역사에 논쟁적인 첫 장을 연 원년 ‘이슬람 전사’ 출신의 작가 겸 영화인 사디 야세프가 9월 10일 별세했다. 항년 93세.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알제리 전쟁 포로들. 만 8년 전쟁으로 알제리인 70만~150만 명이 숨졌고, 프랑스 군인 1만8,000명과 민간인 2,788명이 희생됐다. 위키피디아.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알제리 전쟁 포로들. 만 8년 전쟁으로 알제리인 70만~150만 명이 숨졌고, 프랑스 군인 1만8,000명과 민간인 2,788명이 희생됐다. 위키피디아.


1954년 10월 31일 밤, 알제리 민족주의 무장단체들이 수도 알제와 동부 도시들의 군-경찰서와 산업시설 50여 곳을 동시 습격했다. 농촌-산악 지역에 국한됐던 게릴라의 총구가 식민 통치의 심장부로 향한 거였다. 다음날 아침, 주요 도시에 ‘NLF’란 단체 명의의 전쟁선언문이 나붙었다. 프랑스를 적으로 규정하며, 민중의 역량으로 타도하고 잔재를 청산하자는 선전포고를 겸한 독립선언이었다. 민족운동 중추였던 알제리 인민당(PPA)의 후신 민주자유승리운동(PPA-MTLD)에서 독립한 비밀 지하조직 NLF는 합법 정치무대 한복판에서 테러 무장투쟁을 통해 알제리 인민의 독립 의지와 당위를 유엔 등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부터 지중해 무역 거점이던 알제리는 오스만제국 지배를 거쳐 1830년 프랑스 식민지가 됐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 장악의 교두보로 삼고, 튀니지 모로코 등 '보호령'과 달리 공화국(본국) 영토의 일부로 편입해 외교부가 아닌 내무부가 관장토록 했다. 유럽인의 알제리 정착을 적극 권장했고, 그들의 편의 등을 위한 근대화 사업도 차별적으로 추진했다. 매입과 몰수 등을 통해 토지와 자본을 독점한 프랑스 및 유럽 이주민(일명 콜롱, Colon)과 현지에서 태어난 유럽인(일명 피에 누아르, Pieds-noirs)은 1등시민으로 군림했고, 알제리인은 총체적 불평등 속에 130년 세월을 견뎠다. NLF가 출범한 1954년 말 기준 알제리의 유럽인은 약 98만 명, 알제리인은 848만 명이었고, 초등 교육을 이수한 알제리 남성은 약 15%, 여성은 5%에 불과했다.

19세기 이후 이어진 알제리 민족운동은 2차대전을 거치며 비폭력 노선에서 무장투쟁으로 급격히 선회했다. 그들은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해 프랑스 해방에 기여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여전히 피식민 하층민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동시에 무기와 전투 경험을 얻었고, 해방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45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행사를 기점으로 시작된 ‘세티프 봉기(또는 세티프 학살)’는 알제와 오랑 등 여러 도시에서 폭동 양상으로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폭격기까지 동원한 프랑스 군과 경찰, 민병대에 의해 약 4만 5,000명(프랑스측 추산 6,000~8,000명)이 숨지거나 실종되며 무참히 짓밟혔다. 그 끝에 탄생한 게 NLF였다.

NLF 알제 테러를 지휘한 카스바 토박이

사디 야세프는 1928년 1월 20일 수도 알제의 아랍인 거주지 카스바(casbah) 지역서 태어났다. 학교를 다닌 적 없는 베르베르 족 혈통의 제빵사 아버지는 알제리인민당(PPA) 당원 겸 연락책으로 일했고, 빵집 아들 야세프도 민족주의자로 성장했다. 42년 2차대전 연합군이 학교들을 군사시설로 징발하면서 14세의 야세프는 학업 대신 제빵 기술을 익혀야 했고, 17세에 PPA에 입당해 45년 봉기에 가담했다.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 국내법 지배를 받는 해외 도(Le department francais d’Algerie)였다. 1937년 민족정당 PPA가 출범한 것도 프랑스 국내법이 보장한 정당 설립 자유 덕이었다. 45년 봉기 이듬해 PPA는 강제 해산됐고, 민주자유승리운동(MTLD)이 뒤를 이었다. 야세프는 MTLD의 준군사조직(OS, Special Organization)의 빼어난 전사였다. 그는 49년 OS가 해산된 직후 프랑스로 건너가 노동자로 약 3년을 지낸 뒤 52년 귀국, NLF 창설 멤버들을 도와 군사부문 조직 사업을 이끌었다. 56년 게릴라전을 본격화하던 무렵 그의 직함은 알제 자치지구 NLF 작전사령관이었고, 주 임무는 구역별 테러조직을 관리하며 타깃을 정하고 작전을 지시하는 거였다.

57년 1월 프랑스는 NLF 소탕과 ‘치안’을 위해 제10공수부대를 급파했다. 영화 속 ‘마티외(Mathieu) 대령으로 등장하는 진압군 사령관은 2차대전 자유프랑스군의 영웅 자크 마수(Jacques Massu)와 부사령관 폴 오사레스(Paul Aussaresses) 장군이었고, '샴페인 작전'이라 이름 붙인 소탕전의 핵심 전술은 훗날 스스로 인정한 바 고문이었다. 2000년 오사레스는 알제리인 수천 명을 '실종'시키고, NLF 고위직 25명을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한 사실을 회고록을 통해 거리낌없이 밝혔다. 인터뷰에서 그는 모든 행위는 “다 알다시피” 프랑스 당국의 승인 하에 이뤄졌고, 오직 후회스러운 건 고문으로 그들을 죽이면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몇몇 사례들 뿐이라고 말했다. 68년 프랑스 정부는 사면법을 제정, 알제리에서 자행된 반인륜 범죄의 모든 법적 책임을 면제했지만, 오사레스는 고문이 아니라 고문과 전쟁범죄를 정당화한 죄목으로 2001년 기소돼 7,500유로 벌금형을 받았다.

1955년 해외공작을 위해 스위스에 파견갔다가 귀국한 직후 체포된 야세프. 그는 넉 달 만에 석방됐고, 2년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1955년 해외공작을 위해 스위스에 파견갔다가 귀국한 직후 체포된 야세프. 그는 넉 달 만에 석방됐고, 2년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야세프는 57년 9월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고, 58년 9월 샤를 드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 정부 출범 직후 사면됐다. 글을 깨치지 못한 그가 옥중에서 구술로 쓴 게 회고록이었다.
야세프는 62년 알제리 독립 후 ‘카스바 필름 컴퍼니’를 설립, 폰테코르보를 직접 찾아가 영화 제작을 제의했고, 폰테코르보와 시나리오 작가(Franco Solinas)는 약 18개월간 알제 카스바에 머물며 사건 현장과 관련자들을 인터뷰했다. 영화 촬영에는 단 5개월이 걸렸다. 폰테코르보는 프랑스군 출신의 저널리스트를 주인공 삼아 알제리전투를 다룬 영화를 구상 중이었고, 주연 배우로 폴 뉴먼을 캐스팅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2008년 인터뷰에서 야세프는 “나는 폰테코르보에게 '지금 알제리전투 이야기를 하려는 것 맞냐? 차라리 존 웨인을 캐스팅하는 건 어떠냐? 픽션처럼 보여서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화에 출연한 직업 배우는 프랑스 진압군 대령 '마티외' 역의 장 마르탱(Jean Martin)이 유일했고, 그나마도 당시엔 연극에만 출연해 영화 판에서는 생소한 배우였다. 폰테코르보의 고집으로 야세프도, 시나리오 작가도 영화에 출연했다. 야세프는 2016년 인터뷰에서 "책 내용 중 약 60%가 영화에선 빠졌다. 내가 허벅지에 세 군데 총상을 입은 이야기도 제외됐다.(...) 하지만 최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기 위해 팔다리를 잃고 병원에 있던 아이들을 엑스트라로 출연시켰고, 영화 속 주인공인 알리(Ali La Pointe)가 폭사 당하는 장면과 테러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원래 있던 아파트 건물과 카페를 새로 복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쟁'이 보여준 테러와 고문 이데올로기

저널리스트 출신 연구자 노서경의 ‘알제리 전쟁(1954-1962)’은 전쟁 자체를 밑그림으로 깔고 당시 프랑스와 알제리 및 북아프리카 지식인들의 지적 개입의 양상을 좇은 방대한 책이다. 저자는 해방 전쟁을 지지-지원하며 프랑스 공화국의 제국주의적 위선을 폭로한 레지스탕스 전통의 가톨릭 저항 세력과 진보 언론-출판계, 사르트르 카뮈 프란츠 파농과 레지스탕스 출신 인류학자 제르멩 틸리온 등의 활약상을 상세히 소개했다. 한겨레신문 기자 정의길은 ‘이슬람 전사의 탄생’이란 책에서 “알제리 독립전쟁은 그 잔혹함과 이슬람주의 세력이 가담한 무장투쟁이란 점에서 향후 이슬람권 분쟁의 성격을 보여주는 첫 분쟁”이라 썼다.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원죄를 ‘알제리 전쟁’에서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영화에서 대령은 고문 여부를 추궁하는 프랑스 기자들에게 “프랑스가 알제리에 남기를 바라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 필요한 모든 조치들도 함께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치’란 한 마디로 고문을 포함한 전쟁범죄였다. 공수부대에 체포된 NLF 간부 벤 미디히(Ben M'Hidi)는 민간인 테러의 비열함을 추궁하는 기자들에게 “그럼 민간인 마을을 폭격하는 것은 괜찮은가? 만일 우리에게 폭격기를 준다면 폭탄을 버리겠다”고 말한다. 62년 독립 후 권력을 장악한 NLF는 '하르키(Harki)' 즉 프랑스 당국의 정보원이나 고문기술자 등으로 일하며 출세한 알제리인 친불 부역자 약 15만~25만 명을 처형-학살했다.

1966년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한 영화 제작자 겸 배우 사디 야세프. 위키피디아

1966년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한 영화 제작자 겸 배우 사디 야세프. 위키피디아

2004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원본 필름으로 고화질 영상으로 복원해 세계 전역에서 재상영한 계기도 '이라크 전쟁'이었다. 2007년 인터뷰에서 야세프는 “우리는 여성들도 살해했고..., 맞다, 자궁에서 태아를 끄집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행위는 해방을 위해서였다. 잔인한 적에 대항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그것 뿐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대해 그는 "이라크와 알제리는 다르다"고 전제하면서도 "미국이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량살상무기 등을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지만 당신들이 맞닥뜨릴 것은 칼을 든 민중들일 것이다. 당신들은 침략하는 그날부터 패배할 것이다.(...) 당신들이 평화와 테러 종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무기 생산-판매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권 이후 NLF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일당독재 권위주의 정권으로 변질됐고, 86년 유가 폭락에 따른 재정 파탄으로 실업률 등 경제적 불안이 악화했다. 그 결과 1991년 알제리 총선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이 압승하자 NLF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구국전선 탄압에 나섰다. 이후 만 10년간 최소 1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알제리 내전이 시작됐다. 유럽-아랍 여러 나라와 알카에다 등 무장 원리주의 테러단체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내전은 동포를 대상으로 한 자살 폭탄테러를 포함한 잔혹한 지하드 양상으로 전개됐다. 1997년 NLF 진영의 총선 승리와 99년 대선으로 진정돼 2002년 내전은 끝났지만, 소수 원리주의 무장단체들의 국지적 도발은 지금도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독립 후에도 정치와 거리를 두고 영화인으로 살며, 82년 영화와 같은 제목의 책(Battle of Algiers)을 썼던 야세프는 2001년 상원의원격인 국가평의회 의원에 임명돼 내전 이후의 정치를 자문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2007년 인터뷰에서 “집권 후 NLF 통치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그 정부가 92년 내전의 폭력을, 괴물들을 창조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자살폭탄 테러 등을 비난하며 “해방전쟁은 우리가 살기 위해 벌인 싸움이었지 죽기 위해 벌인 싸움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200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영화 재개봉 행사에 참여한 야세프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게릴라 작전 중 바지에 오줌을 싼 적도 있었지만(…) 그 시절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사형수로 독방에 갇혀 지내면서도 “죽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았다"고, "다만 단두대 앞에서 두려움에 넋이 나가 ‘알제리여 영원하라’고 당당히 외칠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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