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크로스비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단풍나무들이 색색의 비명을 지르는’ 이맘때면 의식처럼 찾는 동네가 있다. 미국 메인주에 있는 아담한 해안마을, 크로스비다. 소금기 어린 바람을 맞으며 도로를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만(灣)이, 그 위로 바닷가재 부표들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부두에서는 고무장화를 신은 어부들이 어망에 걸린 고기들을 손수 분류하고 있다. 고등어를 손질하던 소년이 대가리와 꼬리, 반짝이는 내장을 발라내 허공에 집어던지자 그걸 본 갈매기 몇 마리가 끼룩거리며 선창으로 내려온다.
마을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웨어하우스 바 앤드 그릴’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식당이다. 두툼한 떡갈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우아한 피아노 선율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곳이다. 식당 초입, 칵테일 라운지에는 소형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인이 있다. 검은 치마에 목 부분이 V 자로 갈라진 요란한 분홍색 상의를 입은 중년의 피아노 연주자, 앤지 오미라다. 여자가 건반을 두드리는 동안 손님 한 명이 신청곡을 적은 냅킨을 종업원에게 전달한다. 냅킨에 적힌 곡은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이지만 앤지는 아까부터 연주하던 크리스마스 캐럴을 계속 이어간다. 사연 많은 그의 옛 애인이 신청한 곡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의 연주가 끝나고 라운지가 텅 비어갈 무렵, 발걸음을 옮긴다. 앞마당에 진홍빛 튤립이 심긴 올리브의 집으로, 창밖으로 하얀 파도가 철썩이는 마리나의 카페로, 밤이면 식당들이 창문을 환히 밝히는 메인 스트리트로. 햇볕에 말린 불가사리들로 창틀을 장식한 애니타 하우드의 집도 건너뛰면 섭섭하다. 이 불가사리들은 충분히 마르지 않아 얼마 후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이고, 애니타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바다에 내던질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크로스비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 이름이다. 크로스비라는 지명은 작가의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엘런 크로스비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퉁명스럽지만 매혹적인 중년 여성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크로스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세 편의 단편에 담아낸 이 연작 소설은 2009년 ‘미국인 작가가 미국적 삶을 다룬’ 작품에 주어지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크로스비라는 허구의 공간이 ‘미국적 삶’이라는 커다란 피자의 한 조각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7년 전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평소 독서 습관대로 구글 검색창에 ‘crosby’를 입력하고 소설에 빠져들 채비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별다른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른 빙 크로스비와 그의 동생 밥 크로스비의 존재만 새삼 되새겼을 뿐이다. 소설 끝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 이르러서야 나는 크로스비가 허구의 지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작가가 자신의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작법을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까지 한국에 번역된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총 여섯 권으로, 거의 모든 작품이 메인주에 속한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모든 것이 가능하다'의 배경인 ‘일리노이주 앰개시’ 역시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마을이다). 크로스비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 마을 ‘셜리폴스’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에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등, 가상의 공간끼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서로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기도 한다.
2019년 작가가 '올리브 키터리지'의 후속작 '다시, 올리브'를 발표하면서 두 작품에 묘사된 내용을 토대로 크로스비의 실제 모델이 된 동네를 유추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한 매체에서는 가장 유력한 장소로 메인주의 항구도시 브런즈윅을 꼽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쿡스 코너의 쇼핑몰’이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처럼 크로스비를 실재하는 마을처럼 느끼는 이유는 작가의 공간 묘사가 그만큼 핍진하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미국 어딘가에 이런 동네가 분명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 중인 타운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약국이 있던 자리를 지나친다. 그 자리에는 이제 거대한 자동 유리문이 달린 대형 드러그스토어 체인점이 들어서 있다. 옛 약국과 슈퍼마켓이 있던 자리는 물론, 헨리와 데니즈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서 한담을 나누던 주차장 자리까지 전부 차지해버린 거대한 드러그스토어에는 약만 파는 게 아니고 종이 타월과 각종 쓰레기봉투까지, 없는 게 없다.”('올리브 키터리지' 31쪽)
오감을 자극하는 작가의 탁월한 자연 묘사도 이런 실감을 높이는 요소 중 하나다. 올리브의 남편인 헨리 키터리지가 ‘코끝을 간질이는 솔숲 향기와 소금기 짙은 공기’를 만끽하기 위해 창문을 조금 열고 운전하는 장면이나 ‘단풍나무들이 색색의 비명을 지르는’ 같은 문장을 만날 때면 감탄 이전에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바다와 숲을 곁에 두고 자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서다.
아닌 게 아니라 작가는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바닷가 바위를 뒤덮은 해초와 야생화를 숨기고 있는 뉴햄프셔의 숲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쓰는 자연 묘사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응시해온 것을 그대로 옮기는 자의 떳떳함이 배어 있다. 잠깐 감상에 젖어 눈앞의 자연을 예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서울의 복판, 도시여도 너무 도시인 우리 집 서재에서 ‘바다에만은 진심인’ 크로스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비가 올 때마다 포치 앞 벤치에 앉아 일렁이는 잿빛 바다를 지켜보는 삶은 어떤 것일까, 바다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삶에 대한 탐욕’이 솟구치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의 상승일까, 하고. 40년 가까이 서울에만 산 탓에 ‘내 고향 남쪽바다’의 ‘남쪽’이 주는 뉘앙스를 절반도 채 감지하지 못하는 나는 뉴욕으로, 시카고로 도망쳤다가 끝끝내 연어처럼 돌아오고야마는 크로스비 주민들의 운명을 부러움 반, 안타까움 반으로 조용히 곁눈질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소설을 쓰다가 내가 만든 인물들의 운신의 폭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산란을 준비하는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크로스비로 빠르게 헤엄쳐간다. 내가 모르는 동네, 그러나 어쩐지 알 것만 같은 그 동네가 내 소설의 영토를 한 뼘 넓혀주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유튜브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작가가 참여한 북토크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느 북 페스티벌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작가와의 대화’ 현장을 담은 영상이었는데, 참석한 독자들 중 노년층의 비율이 높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스트라우트가 즐겨 배경으로 사용하는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낸 듯했고, 작가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며 이따금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 본인을 메인주 출신이라고 소개한 한 여성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작가님은 왜 소설을 쓰나요?” 스트라우트가 대답했다. “저는 늘 바라요. 사람들이 제 책을 읽고 나서 타인을 좀 더 이해하게 되기를요. 제가 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이 속한 우주가 좀 더 넓어졌다고 느낀다면 소설가로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회 칼럼에서 박세회 작가는 HBO 드라마 ‘더 와이어’의 배경인 볼티모어에 대해 썼다. 재미있게도 '올리브 키터리지' 역시 2014년 HBO에서 동명의 4부작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다(소설의 판권을 사는 것도 모자라 제작, 주연까지 겸한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이 작품으로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더 와이어’가 실재하는 동네를 주인공처럼 내세운다면 ‘올리브 키터리지’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허구의 동네를 배경으로 삼는다. 초보 소설가인 나에게는 그 또렷한 대조가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로 다가왔다.
예컨대 볼티모어처럼 엄연히 존재하는 동네를 캐릭터처럼 내세울 경우, 실재할 것 같지 않은 인물을 보여줄수록 드라마가 강화된다. ‘더 와이어’에서 거대한 샷건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애인에게만큼은 한없이 다정한 흑인 게이 범죄자와 동네 주민들에게 마약을 파는 10대 갱들, 그들에게 구겨진 지폐를 들이밀며 하얀 가루를 구걸하는 어른들의 존재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볼티모어에 정말 저런 사람들이 있어?’라는 경악과 함께 시청자로 하여금 그 동네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반대로 ‘올리브 키터리지’처럼 가상의 동네를 앞세우면 거기 사는 인물들이 그 동네의 인상을 만들어가는 모양새가 된다. 이 경우 실재할 것 같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 다시 말해 작가가 캐릭터에 인간성을 충분히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섬세하고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요컨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 많을수록 허구의 배경은 점점 더 힘을 얻는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도 언제나 비밀은 있기 마련이니까. 참고로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의 슬로건은 “평범한 삶 같은 건 없다(There's No Such Thing As A Simple Lif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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