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곤의 노크] 홍현익 국립외교원장 인터뷰
문재인 대통령 임기를 약 7개월가량 앞두고 한반도 주변에 다시 대화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재차 종전선언을 제안하고 북한 지도부가 화답하면서다. 북한이 19일 탄도미사일 발사로 찬물을 끼얹기는 했지만 한미일 북핵 대표와 정보기관 수장이 잇따라 만나 종전선언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논의하는 등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최근 대화 무드는 한국 정부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은 18일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의 선비핵화를 주장하며 제재완화에는 선을 긋고 있다”며 “우리가 종전선언을 적극 제안하면서 수동적인 미국을 견인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홍 원장은 “미국이 스냅백(snap back, 제재 복원) 조건을 걸고 대북 제재를 완화해야 교착 국면이 풀린다”고 강조했다.
_한미일 정보수장이 18일 서울에서 만나고 워싱턴에서는 북핵 대표들이 회동을 했다. 한미일 3국 간 대북 정책이 큰 틀에서 조율되는 느낌이다.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 진전을 가져오기 위한 협의가 시작됐다. 긍정적 시그널이지만 미국이나 일본 모두 제재완화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중한 첫걸음이다. 종전선언보다는 인도적 대북 지원에 논의가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식량이나 백신 지원 용의가 있다는 의사표시에서 구체적 행동으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_북한이 인도적 지원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을지가 의문이다.
“인도적 지원에 기술적 지원까지 포함해야 한다. 화이자 같은 코로나 백신의 경우 영하 60도 이하에서 보관ㆍ수송을 해야 하는데 북한에는 그런 정도의 기술 시스템이 없다. 우리가 저온 보관 테크닉과 장비를 제공할 용의 정도가 아니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 북한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여지가 생길 수 있다.”
_최근 미 국무부가 ‘북한에 구체적 제안을 했다’고 발표했는데, 한미일 3각 테이블이 마련된 것과도 관련이 있나.
“구체적 제안의 내용이 제재 완화는 아니고 인도적 지원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조건 없이 대화에 나갈 용의가 있고 북한이 응하라’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미국이 아직은 적극적인 태도를 바꿀 용의가 없는 상황이다 보니 우리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종전선언 등으로 우호적 환경 조성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_앞서 미국을 방문한 서훈 국가안보실장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만나 종전선언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종전선언이 왜 중요한가.
“종전선언은 북미 비핵화 협상을 위해 필수적이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우크라이나와 리비아, 이란이 미국과 협상에서 핵과 대량살상무기를 포기 또는 동결했지만 모두 엄청난 실패를 맛봤다. 김정은 입장에서 이런 미국을 어떻게 믿겠나. 결국 비핵화가 안 되는 이유는 김정은이 미국을 믿고 핵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미국이 반대 급부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안 줬기 때문이다. 미국은 심지어 싱가포르에서 체제안전 보장을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 미국이 김정은에게 조금이라도 믿을 수 있는 구석을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문재인 정부가 생각한 게 또다시 종전선언이다. 미국이 이것조차도 해주지 않으면서 부정적 태도로 나온다면 비핵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_문제는 미국이 수용할지 여부 아닌가.
“미국은 종전선언의 여파를 걱정하고 있다. 2018년 남북미 정상회담 국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방문 시 김정은에게 들은 종전선언이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라 주한미군이나 한미동맹, 주한유엔사령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미국은 수용하지 않았다. 지금도 표면적으로는 북핵 해결이 중요하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국의 패권적 지위 유지와 중국 견제, 주한미군의 안정적이고 저렴한 주둔이 보다 우선적인 전략 목표다. 종전선언이 다른 목표를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에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_그렇다면 미국을 설득할 방법이 없는 것인가.
“2005년 6자회담 결실로 9·19 공동성명을 도출했을 때가 교훈이다. 당시 의장국인 중국이 초안을 만들고 러시아와 남북에 이어 일본까지 순차적으로 동의하자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 동의를 하지 않으면 미국 때문에 합의가 깨졌다는 식으로 발표하겠다고 중국이 압박을 가하자 미국도 결국은 서명을 했다. 미국도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려 평화를 깨는 당사자로 지목당할 위기에서는 합의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이번에도 남북중 3자가 종전선언을 합의하면 미국이 응할 가능성이 있다.”
_그렇다고 중국이 종전선언을 선뜻 수용할지 모르겠다.
“중국과 미국은 현재 전방위 대결 국면이다. 한반도에서 전운이 감돌고 긴장이 고조되면 주한미군이 강화되고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위상이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비핵화를 원하고 종전선언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북미 경색 상황에서는 남북관계도 기대하기 어렵다"
인터뷰 뒷날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최근 대화 모드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홍 원장은 “우리도 하고 있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시험발사이므로 특별한 도발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고 전화 통화에서 밝혔다. 도리어 “우리의 주적은 한미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는 김정은의 연설이나 “종전선언은 의미 있는 제안”이라는 김여정의 평가가 복합적인 곤경에 처한 최근 북한의 속내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_북한이 통신연락선을 복원한 뒤 잇따라 유화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 입장에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기대했던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 정부의 톱다운(top down)과 달리 보텀업(bottom up) 방식을 선언하면서 정상회담 같은 큰 타협이 불가능하게 됐다. 또 미국이 미중 관계나 미국의 패권 유지에 집중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제재를 완화하고 대화할 용의는 전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완고한 바이든 정부의 양보를 기다리기에는 북한의 경제적 상황도 너무 어렵다. 백년하청이라고 판단한 김정은이 내키지는 않지만 한국을 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다음에 보수 정권이 들어선다면 더더욱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_그렇다면 참여정부 말에 남북 정상이 10·4 공동선언을 성사시킨 전례와 비슷하게 문재인 정부 말기 남북정상회담도 기대할 수 있을까.
“참여정부 중후반기 북미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미국이 경수로 제공 구두 유보와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제재로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무력화시키자 북한은 2006년 10월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이는 놀랍게도 11월 미국 중간선거에 여파를 미쳐 공화당 참패를 불렀다. 강경한 네오콘이 물러나고 북미 대화 국면이 펼쳐졌다. 이로써 남북 대화와 임기말 정상회담이 가능해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북미 완전 경색 상황에서는 남북관계도 풀릴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하면서 북미 대화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정상회담 계기나 기회라면 이달 말 로마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과 베이징 동계올림픽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방북에 관심 많은 교황과 만난다면 어떤 계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_야당에서는 대선 승리를 목적으로 임기 말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며 경계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리수를 써서 남북관계를 인위적으로 개선한다고 한들 국민이 표를 몰아줄 리도 만무하다. 반대하는 야당이야말로 남북관계를 대선에 이용하려 하면 국민들이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기본 입장은 남북관계를 정상화시켜 내년 5월 차기정부에 넘겨주겠다는 것인데, 정상적인 관계개선에 야당이 반대한다면 도리어 역풍을 맞지 않겠나.”
"북핵 문제, 미국이 결단하면 6개월이면 해결"
홍 원장은 “내년 대선에서 보수 진영이 승리하더라도 화해협력의 바통을 이어가지 않으면 통일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게 독일 통일의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또 남북 교류와 화해 협력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는 미국은 물론 중국의 협력도 필수적이라는 게 홍 원장의 주장이다. ‘미중 갈등 국면에서 미국과 중국 어느 한편에 서야 한다’는 식의 주의·주장에 대해서는 “수준 이하의 외교정책”이라고 했다.
_북미 대화는 여전히 제재완화와 비핵화의 평행선에서 겉돌고 있다. 교착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트럼프도 철저한 실리주의인데, 바이든은 점잖고 예의 바르면서 국제정치 감각까지 갖춘 실리주의자라는 점이 다르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섰다고 북핵 문제가 풀릴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코로나와 중국, 경제 회복, 아프간 문제 등 북핵보다 더 중요한 전략 목표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북핵 문제는 미국이 결단만 내리면 6개월이면 해결할 수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북핵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걸 미국에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주고 미국이 북한에 대해 신뢰조차 얻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북핵 문제 해결은 어렵다는 점을 계속 설득해야 한다.”
_바이든 정부가 우리 정부의 설득을 귀담아들을지 여부가 문제다.
“제재의 진정한 목적은 북한의 정상 국가화와 비핵화 이행이 목적인데 현 상황에서는 도리어 북한이 핵개발에 집착하는 명분이 되고 있다. 제재받는 상황에서는 비핵화는커녕 대화도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제재가 본래 기능을 못하고 네거티브 기능을 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비핵화를 조건으로 더 이상 강화할 수 없는 제재를 일부 풀어주되 비핵화를 안 하면 다시 제재를 복원하는 스냅백을 동원하는 게 현명하다. 쿠바의 경우를 보자. 미국이 50년 이상 제재를 가했지만 쿠바는 항복하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에서 화해협력 정책으로 전환하고 교황까지 나서서 중재를 한 끝에 겨우 수교하고 관계를 정상화했다. 쿠바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을 제재로 굴복시킨다는 접근 자체가 불합리하다.”
_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중국의 역할을 활용할 방안이 있다면.
“중국은 우리 국가전략에 반드시 협력을 구해야 하는 나라이다. 경제는 물론이고 북핵 해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한 급변사태 대비, 평화통일 등 국가 중대사에 모두 협력이 필요한 중요한 나라이다. 미국이 군사안보 부문에서 중국을 압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중국과의 경제 분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경제 위주의 동북아 질서 구축을 중국에 제안한다면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한반도의 평화와 북핵 문제 해결이 중국에도 유리하다는 점을 설득하면서 공동으로 북한에서 협력사업을 펼치면서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는 등 한반도 전략에서의 협력도 도모해야 된다.”
_미국과 중국의 극한 대결 국면에서 우리 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지 못하고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도리어 문제 아닌가.
“우리가 일관되게 지킬 수 있는 외교 기조를 선언할 필요가 있다. '국제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한 전방위 협력'이 핵심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내세운 포용성·개방성·투명성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어떤 협력도 가능하지만, 상대방을 압박하거나 견제하는 정책에는 협력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 상황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처한 입장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명·청 사이에서 기우는 명을 선택해 병자호란을 당했던 것처럼 또다시 미국과 중국 둘 가운데 어느 나라를 선택해야 한다는 접근 방식은 차선도 차차선도 아닌 낮은 수준의 정책이다. 한미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관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가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