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발의 그늘, 토지수용과 원주민
편집자주
성남 대장동 특혜개발 의혹으로 부동산 시행사업의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한국일보는 합법과 불법을 줄타기하며 한탕 수익을 추구하는 시행사의 실태와 대안을 3회에 걸쳐 살펴봅니다.
"1980년대 초 군에서 제대하고 여기서 가족들이 다같이 모내기를 했었지. 그때는 저 개울 너머까지도 우리 논이었는데, 농기계가 없었으니 아버지부터 형들과 누나, 일꾼까지 30명 넘게 달라붙었어. 아버지가 '한시라도 놀면 안 된다'고 구박을 하셔서 한바탕 다퉜던 게 아직도 생생해."
지난달 25일 오전 인천 계양구 병방동에서 만난 박원하(59)씨는 손끝으로 너른 밭의 어디쯤을 가리키며 가족들과의 추억을 더듬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농부로 살았다는 그는 1990년대 인근에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물길이 끊긴 탓에 논농사를 그만둬야 했을 때도, 생활비가 부족해 막노동판을 전전할 때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큰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조카들이 상속받은 땅까지 합쳐 약 6,600㎡(2,000평)를 도맡아 일궜다.
그러던 2018년 12월 19일 정부가 발표한 '2차 수도권 주택공급 계획'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대대손손 지켜온 터전이 3기 신도시 계양지구에 포함된 것이다.
박씨는 토지 보상을 받으면 주변의 다른 밭을 사려고 했다. 2012년 빚을 내 시작한 복숭아농사가 겨우 흑자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박씨에게 통보한 3.3㎡(1평)당 보상가는 125만 원. 수십 년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인 탓에 주변 시세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여기에 40%에 육박하는 양도소득세까지 부과돼 수중에 쥐는 돈은 더 줄었다. 박씨는 "LH의 보상가로는 인근에 살 수 있는 땅이 없다"며 "농사를 계속 지으려면 강원도로 가야 할 지경"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박씨가 한숨을 몰아쉰 그날 LH는 3기 신도시 2차 사전청약을 시작했다.
지난 한 달간 인천 계양과 하남 교산, 남양주 왕숙 등 3기 신도시를 비롯해 수도권 공공택지 지구에서 만난 원주민 50여 명은 토지수용에 대해 피끓는 한탄을 쏟아냈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무시돼온 이들의 목소리다.
"나라에서 하겠다는데..." 눈 뜨고 코 베이는 강제수용
땅은 누군가에게 평생을 바친 삶의 터전이지만, 누군가에겐 수개월 만에 결정되는 개발계획의 부속품일 뿐이었다. 예고도 없이 "집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주민들은 황당함을 넘어 극한의 분노를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공공택지 선정 때 주민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 고양시 용두동의 최모(64)씨는 "미용실에서 파마하다가 TV를 보고 알았다"며 "태어나서 평생 살아온 집에서 내쫓는데 그 소식을 뉴스로 들어야 하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경기 하남시 교산동에 사는 주부 김모(66)씨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 양모(70)씨를 위해 7년 전 낡은 집을 허물고 2억5,000만 원을 들여 새집을 지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휠체어에서 보내는 남편을 위해 문턱을 없앴고 장애인용 화장실도 만들었다. 김씨는 "남편이 고향을 떠나기 싫어해 인근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는데 개발 소식에 가격이 뛰어 전세를 구하기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양씨 대신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동생 양태준씨는 선산의 조상 분묘 60여 기를 이전하기 위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분묘이전비 등을 보상해준다고 하지만 어떤 수목장이나 납골당을 가봐도 그 값으론 택도 없다"며 "300년간 집성촌을 이뤄 집안 대대로 살아왔는데 이제 어디에 다시 정착해야 할지 상상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귀농한 지 1년도 안 돼 새집을 찾아야 하는 부부도 있었다. 조모(58)씨는 2018년 3월 서울 강동구에서 하남시로 이사왔다. 남편 김모(66)씨의 당뇨가 심해져 밭일 등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기 위해 전 재산 5억 원을 들여 토지를 매입해 평생 살 집을 지었다. 조씨는 "교산동 일대가 청동기 유적이 많이 발견돼 개발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귀농을 결정했는데 갑자기 신도시로 지정돼 황당했다"고 혀를 찼다.
나라에 땅을 빼앗긴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사람도 많았다. 정부가 서울과 가까운 지역부터 점차 외곽으로 택지개발을 이어나가면서 바깥으로, 바깥으로 내몰린 것이다. 하남시에 거주하는 홍모(60)씨는 "2010년 미사지구, 2012년 강일지구에 이어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강제수용"이라며 "땅값이 너무 올라 이제는 경기도를 떠나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택지개발 계획이 발표된 뒤 주민설명회와 공청회, 전략환경영향평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공공주택법상의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된 후에야 개발이 확정된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에서 정부 결정이 뒤집히는 일은 없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심재만 군포대야미 공공주택지구 주민대책위원장은 "우리 지역은 규모가 작아 주민이 적으니 LH 직원이 '다른 곳에 비해 점잖다'고 할 정도였다"면서 "아무리 반대하고 요구사항을 말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신도시가 취소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정부 계획대로 진행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신도시 부지 90%가 개발제한구역... 턱없이 낮은 보상가
주민들이 토지수용으로 '벼락부자'가 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실상과 전혀 다르다고 항변했다. 개발 대상지역 대부분이 1970년대 그린벨트로 지정돼 50년간 가격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상가를 산정할 때 기본이 되는 공시지가 자체가 매우 낮은 수준이다. 받은 보상금으로 다른 곳에 다시 터전을 마련해 생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이유다.
3기 신도시만 따져도 계획 면적의 90% 이상이 그린벨트다. 남양주 왕숙지구는 889만㎡ 중 856만㎡(96.3%), 왕숙2지구는 239만㎡ 중 217만㎡(90.5%)가 그린벨트다. 인천 계양지구(96.8%)도 대동소이하다. 부천 대장지구는 계획 면적의 100%가 그린벨트다. 토지수용 대상이 대부분 농민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인천 계양구에 사는 홍양숙(53)씨는 "보상가가 낮은 개발제한구역을 이용해 공공택지를 만드니 개발이익이 커지는 것"이라며 "50년간 침해당한 우리 재산권으로 남의 배만 불리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동네 장순영(59)씨도 "수십 년간 그린벨트였지만 그래도 농사는 짓게 해줘서 고맙게 여겼다"며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고 평생 농사만 지어온 사람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변호사부터 시행사까지... 개발 소식에 몰려드는 하이에나들
토지보상금이 고스란히 주민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내년까지 3기 신도시에서만 약 32조 원의 보상금이 풀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주민들은 이 돈을 노린 '하이에나'들의 표적이 된다.
가장 먼저 이득을 보는 건 개발 정보를 정부 발표 이전 입수해 토지를 매입한 부동산 투자자, 외지인들이다. 상속받은 인천 계양구의 전답을 5년 전 처분했다는 A(42)씨는 "그린벨트니까 주변에 비해 4분의 1 가격이어도 싼값에 팔 수밖에 없는데, 시세보다 조금 높은 평당 80만 원을 주겠다고 해 팔았다"면서 "보상가가 150만 원이 넘게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공공택지 개발계획이 발표되면 가장 먼저 주민들에게 접근하는 건 변호사와 세무사라고 한다. 국토교통부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수용재결과 이의재결을 거쳐 법원 행정소송까지 진행될 경우 변호사 수임료가 수백만 원에 이른다. 토지소유권이 형제들에게 분산돼 있는 등 소유 관계가 복잡해 가족 간 송사와 상속, 증여 과정에서 나오는 수입도 상당하다. 수사가 진행 중인 성남 대장동 개발처럼 아예 변호사 출신이 직접 사업에 뛰어들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분양대행사 임원은 "시골 노인들은 변호사 명함만 보여주면 믿고 맡기는 경우가 많다"며 "일부 법무법인들은 감정평가 시 의견서를 부실 작성해 일부러 수용재결까지 끌고가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대토보상권을 노린 시행사들의 불법 행위도 횡행한다. 대토보상제는 공공택지에서 토지수용 시 현금 대신 새 개발지의 땅을 지급하는 제도다. 정부는 지난해 토지보상법 개정을 통해 대토보상권 전매를 금지했지만, 시행사들은 법망의 허점을 이용한다. 토지보상 전 처분신탁을 통해 소유권을 넘겨받거나 '생활안정자금' 명목으로 보상금을 선지급해 개발예정지역의 목 좋은 땅을 선점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수수료로 보상금의 최대 10%를 떼기도 한다. 모두 편법 양도행위로 불법이지만 국토부와 LH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3기 신도시 중 현재 대토시행사들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과천이다.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인근에는 시행사들의 투자설명회 안내 플래카드 수십 개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과천시에 사는 김모(65)씨는 "3기 신도시 발표 후 대토시행사들에서 전화만 수십 통이 왔다"면서 "수천억이 굴러가는 돈놀이판에서 주민들은 돈 잃어주는 호구"라고 한탄했다.
임차농들도 낮은 농업손실보상금에 한숨
토지수용으로 피해를 보는 건 임차농들도 마찬가지다. 현행 토지보상법은 농업인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농업손실보상금을 지급하는데, 경기도의 경우 3.3㎡당 1만2,000원 수준이다.
과천시에서 10년 가까이 화훼농사를 한 B(47)씨는 "작물별로 소득이 다 다른데 재배 작물을 고려하지 않고 보상금을 정한다"면서 "보상금액이 너무 적어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군포시 대야미동에 사는 심홍보씨의 경우도 임차농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년째 종친회 소유의 논을 경작해온 심씨는 낮에는 논농사를, 아침저녁엔 유치원 통학버스를 운행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심씨는 "투기했던 LH 직원들은 땅 하나를 여러 필지로 쪼개서 분양권을 여러 개 받아 이익을 챙기고, 우리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한평생 농사만 지은 사람들만 손해를 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강봉 하남교산 공공택지지구 주민대책위원장은 "정부나 LH가 토지수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주민들과의 원활한 소통과 협의가 아니라 보상을 빨리 끝내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라며 "낮은 보상가도 문제지만 법이란 무기로 주민들을 국민 취급도 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가 분노를 더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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