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애도의 노래' B♭ 단조
편집자주
C major(장조), D minor(단조)… 클래식 곡을 듣거나, 공연장에 갔을 때 작품 제목에 붙어 있는 의문의 영단어, 그 정체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음악에서 '조(Key)'라고 불리는 이 단어들은 노래 분위기를 함축하는 키워드입니다. 클래식 담당 장재진 기자와 지중배 지휘자가 귀에 쏙 들어오는 장ㆍ단조 이야기를 격주로 들려 드립니다.
반음 내려간 시(B)가 으뜸음인 B♭ 단조는 추모의 성격이 짙다. 유독 이 조성으로 만들어진 음악들은 영원한 작별의 시간과 어울리곤 했다.
지중배 지휘자(이하 지): 두 팔을 하늘로 올리고 무릎을 꿇은 채 죽어가는 군인의 초상으로 유명한 고전영화가 있다. 베트남전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그린 '플래툰(1986)'이다. 이 영화의 대표 주제곡 중 하나는 미국 작곡가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다. 참혹한 전장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았던 군인 일라이어스(윌렘 대포 분)가 총탄에 맞아 전사하는 순간에도 흐르는 이 음악은 전쟁 희생자를 위한 레퀴엠으로 기능한다.
장재진 기자(장): '화성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 작곡가 라모는 B♭ 단조를 두고 "애도의 노래"라고 했다. 실제로 이 조성으로 쓰인 바버의 아다지오는 아인슈타인과 존 F. 케네디, 그레이스 켈리 등 명사들의 추도식에서 연주되곤 했다. 10분 남짓 짧은 현악곡이지만 조금만 들어도 금세 숙연해진다.
지: 6년 전 쇼팽 콩쿠르에 출전했던 조성진은 본선 2차에서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B♭ 단조)을 연주했다. 피아노 레퍼토리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곡에는 '장송 행진곡'이라는 부제가 있다. 작곡가는 생전 자신의 곡에 고정된 이미지를 부여하는 일을 경계했지만, 소나타 2번만큼은 스스로 정체성을 담았다. 쓸쓸한 3악장이 특히 유명한 이 곡은 유럽의 많은 장례식장에서 연주되고 있다.
장: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관현악곡 '슬라브 행진곡'도 B♭ 단조의 작품 중 하나다. 1876년 작곡가는 러시아음악협회로부터 세르비아-투르크(터키) 전쟁 희생자를 위로하고, 세르비아의 승리를 기념하는 곡을 의뢰받았다. '슬라브 행진곡'은 그런 배경에서 쓰였는데, 이 때문에 곡 초반에는 전쟁의 고통을 상징하는 듯한 무거운 선율이 세르비아 민요를 바탕으로 흘러나온다.
지: 차이코프스키가 '슬라브 행진곡'을 쓰기 꼭 2년 전. 그는 불멸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바로 협주곡 1번(B♭ 단조)이다. 원래 차이코프스키가 몸담았던 모스크바음악원의 원장이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당사자로부터 혹평을 받고 작곡가가 격분한 일화가 유명하다.
장: 하지만 오늘날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위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제32회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소속 선수들이 메달을 땄을 때 러시아 국가를 대신해 경기장에 울려 퍼진 음악이기도 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징계 탓에 러시아가 국가 자격으로 대회에 참여하지 못하고 시상식 때 국가 연주도 금지되자, 대안으로 택한 곡이었다. 러시아인에게 차이코프스키와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의미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5월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장윤성 지휘)와 다음 달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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