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온상'으로 오명 쓴 20년 시행업 史
지자체 인허가가 사업 성패 결정하지만
절차 복잡·불확실, '뒷돈' 유혹에 취약한 구조
편집자주
성남 대장동 특혜개발 의혹으로 부동산 시행사업의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한국일보는 합법과 불법을 줄타기하며 한탕 수익을 추구하는 시행사의 실태와 대안을 3회에 걸쳐 살펴봅니다.
국내에서 부동산개발사업에 특화된 시행사, 즉 디벨로퍼의 역사는 길지 않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거치며 대형 건설사들이 이전처럼 대규모 개발을 주도하기 어려워지자 그 틈을 비집고 성장했다.
20여 년에 불과한 기간 동안 시행사들은 수많은 '흑역사'를 써 왔다. 지방자치단체 말단 공무원부터 유력 정치인까지 수많은 정관계 인사들이 시행사의 편의를 봐주고 뒷돈을 챙긴 혐의로 법정에 섰다.
한국일보가 만난 시행사 관계자들은 지금도 유착과 비리의 유혹이 여전하다고 털어놨다. 지자체가 쥔 '인허가권'을 사업에 유리하게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예나 지금이나 억 단위의 로비도 감수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성남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굿모닝시티가 쏘아 올린 ‘민관 유착’, 더 대담하고 조직적으로
인허가와 관련된 시행사의 대규모 로비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2001년 서울 동대문시장 '굿모닝시티 사건'이다. 부지 확보조차 안 된 대형 복합쇼핑몰을 분양부터 해 3,700억 원대의 피해를 입힌 사건 뒤에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한 인허가 로비가 있었다. 시행사 대표 윤창열씨가 정대철 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을 통해 서울 중구청을 회유하려고 4억 원을 건넸으나 인허가를 앞당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로비는 개발 영역을 가리지 않았다. 서울 양재동에 복합유통센터를 짓는 '파이시티 사업'에서도 시설 용도 변경 등 인허가 봐주기 명목으로 강철원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이 수천만~수억 원을 챙긴 사실이 드러났다. 굿모닝시티 비리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2006년부터 2008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부산 해운대의 초고층 복합건물인 엘시티를 둘러싼 금품 비리 사건의 불똥은 청와대까지 튀었다. 2007~2010년 사업계획상 불가능한 주거시설을 허용하고 건축 높이 제한을 풀어주는 등 엘시티 사업에 대한 부산시청과 해운대구청의 이례적인 인허가가 줄줄이 이어지자 로비 의혹이 불거졌다. 검찰 수사 결과 엘시티PFV의 실소유주 이영복 회장이 배덕광 전 자유한국당 의원과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유력 인사를 상대로 대대적인 로비를 벌인 사실이 드러났다.
정관계 인허가 로비는 현재 진행형이다. 정찬민 국민의힘 의원은 용인시장이었던 2014~2018년 용인 기흥구 일대 건설사업 인허가 과정에서 시행사에 편의를 제공하고 뇌물을 받은 혐의로 1일 구속기소됐다.
시간이 곧 돈, 인허가 앞당기기에 혈안
2002년 '오포 개발'과 2011년 '제주 판타스틱 아트시티'도 인허가 비리로 도마에 오른 굵직한 개발사업이다. 이 밖에 이름이 붙지 않은 수많은 사업들이 인허가 관련 비리로 수사를 받았다.
시행사가 지자체의 인허가 단계에서 사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공을 들이는 것 자체는 '순리'다. 최소한의 계약금으로 토지를 확보한 뒤 인허가를 거쳐 땅의 부가가치를 끌어올리는 게 시행업의 역할이자 수익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즉, 인허가가 사업 성패는 물론 사업의 시행 여부 자체를 결정 짓는다.
문제는 '인허가 리스크'가 사업 과정에서 한두 단계에 걸쳐 해소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도시개발사업을 기준으로 보면 구역지정에서부터 준공까지 시행사가 거쳐야 하는 인허가는 수십 개의 지자체 부서와 연관된다. 절차가 복잡하고 대상이 다양하니 담당 공무원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도 많아진다. 사업 기간을 단축해 제때 상품을 공급해야만 대출 이자와 미분양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시행사 입장에서는 뒷돈을 주고서라도 인허가를 앞당기려는 '유착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항소심 판결문에서도 업계의 이런 관행을 엿볼 수 있다. 김 전 차관에게 금품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사업가 최모씨는 법정에서 "시행업 특성상 분양을 하나 끝내고 나면 인허가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 하는 의혹 때문에 특수부의 타깃이 된다"고 진술했다. 뇌물공여에 관한 최씨 진술의 신빙성은 파기환송심에서 다뤄지게 됐지만, 검찰의 타깃이 된다는 점에는 다수의 시행사 관계자들이 공감을 표했다.
정관계 인사 정보 수집은 기본, 땅 좁은 지방서는 더욱 심각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당 지역 정관계 인맥 파악은 기본 중 기본이다. 20년 넘게 시행사에 몸담고 있는 A씨는 "친분으로 인허가를 앞당길 수 있어 지역구 국회의원, 시장, 시의원까지 중·고등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친인척은 누구고 그 자녀들은 어디에 다니는지 등을 꼼꼼히 파악한다"면서 "만나서 밥이라도 먹으며 계속 접점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퇴직 공무원이 차린 업체를 통해 로비를 하는 것이 '꿀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 시행사 대표 B씨는 "인허가가 어려워도 전직 공무원이 연관된 회사를 통하면 전관예우로 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가 돈다"면서 "전직 공무원의 역할에 따라 로비 금액은 많게는 억 단위까지 올라 간다"고 했다.
개발사업을 둘러싼 '민관 유착'에 대한 고백은 공직 사회에서도 흘러나온다. 전직 공무원 C씨는 "수도권 외곽만 가도 공무원과 토지주가 같은 동네 사람이고 시의원과 전부 선후배 사이"라면서 "업자들이 몇 다리만 건너면 지자체 담당자를 만나기 쉬우니 저녁자리를 마련해 인허가 이야기도 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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