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 운명 가른 6·29선언 주인공
유연한 리더십에 ‘물태우’ 조롱당해
북방외교·대북정책은 탈보수 신기원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보통 사람’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물태우’로 조롱당하며 임기를 마친 사람이 있다. 퇴임 후에는 12·12 군사반란과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징역 17년을 확정 받아 헌정사에 깊은 오점을 남겼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고(故) 노태우씨다. 오랜 병상 생활로 잊혀져 가던 그의 이름이 지난주 별세를 알리는 속보와 함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기자는 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다. 87년 체제 이후 마지막 군 출신 대통령 노태우의 부침을 몸으로 직접 겪었다. 그런 까닭에 386세대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장면으로 6·29선언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6·29선언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호헌카드를 뒤집고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한다는 언필칭 대국민 항복 문서다. 게다가 대한민국이 민주화로 가느냐, 군부독재의 일상화로 가느냐에 대한 분수령이 된 지점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1987년은 군부독재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려는 6월 항쟁 시위가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기자는 수도권 외곽 부대에서 육군 이등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생생한 것은 6·29선언 전날이다. 28일 오전부터 야산에서 나무 몽둥이를 깎고 다듬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일과 후에는 전 부대원이 완전 군장 차림으로 내무반에서 비상 대기에 들어갔다. 병사들은 저마다 ‘충정봉’이라는 이름의 몽둥이를 손에 쥔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비상 계엄령 선포 즉시, 진압군으로 서울 시내에 투입될 참이었다. 훗날 드러났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미 계엄령(작전명령 제87-4호)선포를 기정사실화하고, 택일(擇日)만을 남겨뒀던 것이다.
만일 6·29선언이 없었다면 기자는 계엄군으로서 시위대와 유혈 충돌했을 것이다. 무자비한 곤봉세례와 피를 부르는 진압작전 맨 앞줄에서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려 스러져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5공화국 군사정권의 폭주를 저지한 문서를 구상하고, 직접 발표한 고인의 역할이 가장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한번 핏빛으로 얼룩질 한국현대사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한민국을 구해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인은 민주 진영을 이끌었던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의 분열 탓에 어부지리로 직선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실상은 노골적인 관권선거였다. 기억하건대 87년 12월15일 대선 전날 밤, 대대장 이하 간부들이 병사들을 모아놓고 정신교육 미명하에 “기호 2, 3번을 찍으면 나라가 불안해진다”며 “안정감을 주는 기호 1번을 찍으라”는 조직적인 회유가 있었다.
하지만 재임 당시 고인은 보수 출신 한계를 딛고, 진보적이고 유연한 리더십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그는 88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와 소련 및 중국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북방외교를 추진해 대한민국의 외교 지평을 한껏 넓혔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역시 고인의 업적이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한 기본합의서도 채택했다. 상호 체제인정과 불가침, 교류·협력 확대가 골자다. 진보와 보수 이념을 떠나 이게 전제되지 않으면 대북정책은 반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고인의 텃밭을 정치 본향으로 삼는 보수 대권후보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대북정책을 보면 시계를 거꾸로 돌리다 못해, 곧 전쟁이라도 벌일 판이다. 남북이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기로 한 9·19 군사합의도 파기하겠다고 한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핵무장 공약까지 내걸고 있다. ‘무식한 지도자가 신념을 가질 때 최악의 리더십이 나온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