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불교 하면 윤회론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다. 또 요즘 들어 드라마나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윤회와 환생을 통한 신비적인 내용이 다루어지며, 이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증대되는 모양새다.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윤회는 '전생 최면' 같은 제한적인 가십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수의 게임에 '환생 시스템'이 있고,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느냐?' 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등의 표현이 유행하는 상황이 되었다.
윤회론은 사실 불교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 인도의 전통문화에 윤회론이 존재하며, 불교는 이러한 바탕 위에 존재하는 구조일 뿐이다. 마치 동아시아에 제사 문화라는 특수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도 문화에는 윤회론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는 사실 윤회론이 없어도 문제없이 돌아간다. 만일 불교에 윤회론이 필수라면, 불교는 인도 문화권을 벗어나 세계종교로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인도 문화에 윤회론이 존재하며, 불교는 이로 인해 윤회론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이것이 필수는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완전한 성취, 즉 깨달음이다. 이를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윤회는 극복 대상일 뿐, 결코 목적일 수 없다. 즉 불교는 윤회를 말하는 종교가 아니라, 윤회라는 속박을 넘어서는 진정한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인들이 말하는 윤회론은 무엇일까? 우리는 한국에 태어나서 살지만, 한국인 중 일부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우리나라보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필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인도인들은 윤회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분노하거나 어리석어 아둔하면, 이 사람에게는 동물적 속성이 보다 강하게 작용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무게 중심이 옮겨지면서 환생할 때 동물이 된다는 것이다. 또 지적이며 너그럽고 선함이 견고하면, 신이 될 수 있다. 이는 수직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수직 윤회'라고 한다.
윤회에는 '수평 윤회'도 존재한다. 마치 한국인 중 프랑스를 너무 좋아해서 덕후가 되고, 이것이 견고해진 상태에서 죽게 되면 프랑스인으로 태어난다는 설정이다. 즉 수평 윤회는 평등 관계에서 삶터가 변화하는 것이고, 수직 윤회는 사다리와 같이 세계 자체가 상하로 이동하는 구조이다.
윤회론이 사후의 심판과 다른 것은 별도의 심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윤회는 심판의 결과가 아닌,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인도의 윤회론은 나름의 설득력과 개연성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수천 년 동안 유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론에 큰 관심이 없다. 전생과 내생보다는 지금 존재하는 실존으로서의 나, 즉 현생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현실적이고, 자기 완성과 지금의 행복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길의 끝이 무너지지 않는 '행복의 완성' 즉 깨달음의 대자유이다.
붓다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행복을 말한다. 그리고 오늘의 내 삶이 올바르고 정당하다면, 윤회가 존재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설파한다. 현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선진국화될수록 자기 구현의 욕구는 보다 강렬해진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선진국을 휘감고 있는 문화에 명상이 존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현대 서구에서, 동양을 대변하는 정신문명의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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