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결과는 포퓰리즘에 좋은 기회
트럼프 등장도 금융위기가 뿌린 씨앗
인기영합 사탕정책 최종 피해는 국민
편집자주
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세계가 근 2년 만에 ‘위드 코로나’에 진입하면서 이르긴 하나 코로나19 결산이 시도되고 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세계는 봉쇄를 풀고 점차 복원되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기대했던 팬데믹 이후 새로운 세계의 연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연대하기보다는 각자도생 하듯 흩어지며 극단주의, 민족주의가 부추겨지는 모습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적 위기로 인해 국가 간 신뢰가 놀라울 만큼 부족해졌다”며 ‘비연합 국제’란 이름을 붙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 지금의 작은 변화들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장담하기엔 아직 이르다.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역대 위기들인 아시아 외환위기, 9·11사태,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코로나 위기는 모두 양상이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더라도 끝내 세계에 엄청난 지진파를 일으킨 비대칭적 충격이란 얘기다.
실제로 트럼프 정부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은 2008년 금융위기가 트럼프 등장의 씨앗을 뿌렸다고 했다. 위기로 인해 보호주의, 이민규제, 문화적 국수주의 같은 인기영합적 정책들까지 거부감 없이 수용되면서 8년 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길이 열렸다는 주장이다.
주목되는 것은 코로나 최대 피해군 중 하나인 정치 지도자들의 움직임이다. 이들은 반복되는 위기의 대응에 실패를 거듭하며 지지율 급락을 경험하거나 아예 권력을 내주어야 했다. 팬데믹 기간 지도자가 바뀐 곳은 주요 20개국(G20)만 해도 미국 일본 이탈리아가 있다. 임기는 남았으나 권력 교체를 앞둔 지도자들도 많다. 이제 시작 단계인 코로나발 정권교체가 어떤 파장을 초래할지 예상하기 힘들지만 포퓰리즘의 재등장에 대한 경고음은 벌써 커져 있다.
포퓰리즘 정치에 주목해온 영국 역사학자 티모시 가튼 애쉬는 팬데믹 자체는 포퓰리즘에 불리한 시간이었으나 팬데믹의 결과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인플레이션이든 스태그플레이션이든 코로나 위기가 초래한 어려운 경제적 난제가 인기영합 지도자들에게 호기로 작용한다는 게 그의 예상이다. 백악관도 지난 3월 발표한 잠정 국가안보전략 지침(INSSG)에서 팬데믹과 기후변화, 반민주주의 권위주의 포퓰리즘 부상 등을 체계적인 문제들로 거론하며 국가안보를 위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행인 점은 이 같은 어두운 전망과 달리 현실에선 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잡은 포퓰리즘 정권들이 코로나로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 남미의 이들 정권은 마스크 착용 공방에서 보듯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여론을 따라 코로나 초기에 개방적인 방역에 치중했다. 그러나 정치적 고려가 중시된 이런 판단은 방역 실패와 대규모 희생으로 이어졌고 그 반작용으로 강경한 대책이 동원되면서 정책, 정권에 대한 연쇄적 불신을 가져온 결과다.
망치와 낫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30년이 넘은 동유럽에서 불길처럼 퍼진 우파 포퓰리즘 정권들의 추락은 심각한 상태다. 코로나의 위기 상황에서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인기영합 정책들은 소용이 없었다. 지지를 얻기 위해 더 극단적이거나 보수와 진보를 오락가락하는 정책들까지 쏟아내면서 여론의 피로도 또한 높아졌다.
지난달 체코 하원 선거에서 ‘체코의 트럼프’로 불리는 바비시 총리는 연금지급 확대 등 사탕정책까지 동원했으나 다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결국 야당인 좌파 연정에 권력을 넘겨주게 된 바비시를 향해 언론들은 '포퓰리즘에 대한 보복'이라고 평가했다. 루마니아 내각은 이달 초 불신임 투표 가결로 실각위기에 놓여 있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코로나 치명률을 기록 중인 불가리아는 이달에 올해 들어서만 세 번째 총선이 예정돼 있다.
인기 하락에도 여전한 정치불신과 좌파, 야당의 무능은 포퓰리즘 정권의 충분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헝가리, 폴란드, 슬로베니아의 3개국은 ‘신 악의 축’에 비유될 만큼 대표적인 동유럽 포퓰리즘 정권이다. 이들 정권 역시 공통적으로 팬데믹 대응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 직면해 있긴 하다. 슬로베니아의 야네스 얀사 극우 정부의 경우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출범했으나 지금은 20~30%대 지지율에 머물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TV방송국 시청률은 1%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안전판과 보호막을 찾는 국민들을 향해 자신들에게 의지하라며극단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다. 반난민 정서에 호소해 집권한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내년 총선을 겨냥해 세금 환급, 청년 세금면제 같은 현금 뿌리기 정책을 들고나왔다. 폴란드의 모라비에츠키 우파 정부도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지자 부자증세, 최저임금 인상 등 갑작스런 좌파 정책으로 여론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인기영합 정책의 최종 피해자가 국민인 것은 최근 코로나 재기승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동유럽은 현재 코로나 최악 지역이다. 전 세계 인구의 4%가 거주하지만 세계의 신규 코로나 감염자 20%를 차지하고 있다. 누적 감염자가 2,000만 명을 넘어 팬데믹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든 상태다.
이 같은 코로나 기승은 낮은 백신 접종률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서유럽은 70% 이상이 백신 접종을 완료한 상태이나 동유럽의 루마니아는 36%, 불가리아 25%, 우크라이나 16%에 불과하다. 낮은 접종률은 충분한 백신이 있는데도 국민들이 접종을 꺼리기 때문인데 우크라이나에선 의료진조차 40%가량이 백신 기피자로 분류되고 있다.
세계 어느 곳보다 백신을 구하기가 쉬운 유럽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는 정치 불신, 포퓰리즘 정권의 실패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남미의 대표적 포퓰리스트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의 경우 개인적인 것이 얼마나 정치성을 띠는지 보여준다. 그는 코로나의 심각성을 무시하고 백신 효능에 의구심을 표하며 말라리아 치료제를 코로나 치료제로 권장하는 기행까지 벌였다. 방역실패에 따른 9가지 혐의로 기소를 앞두고 있지만 국민들은 보우소나루의 잘못된 코로나 행보로 지금까지 6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기록 중이다.
포퓰리즘이 팬데믹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닌 점은 분명해지고 있다. 트럼프조차 팬데믹의 위험을 무시하고 머뭇거리다 서툴게 대응하면서 정권을 내줬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포퓰리스트에게 또 다른 기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016년 갑작스런 트럼프의 당선과 이후 유럽, 남미에서 타오른 포퓰리즘의 배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 분열과 경제 불평등, 엘리트주의에 대한 불신은 해소되기보다 팬데믹으로 인해 그 정도가 심해져 있다. 여기에 더해 철학자 지젝은 포퓰리즘 정권들의 최대 자산은 국민 지지가 아니라 과도하게 윤리 문제에 집중해 유권자들이 바라는 경제 문제 해결에 무관심하고 분열된 야당이라고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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