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국외문화재를 소개하고, 활용 방안과 문화재 환수 과정 등 다양한 국외소재문화재 관련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마다 전합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보니 성채의 벽 위로 하얀 눈송이가 흩날려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낯익은 그 흰 눈에 나는 행복했다. 그것은 내 작은 고향 마을 위로, 그리고 송림만 위로 빙빙 돌며 내리던 그 눈과 똑같은 것이었다.”
독립군 출신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1946년)’에 나오는 내용.
황해도 해주 출신 이미륵(본명 이의경, 1899~1950)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ㆍ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일제의 검거령이 곧바로 떨어졌고, 이미륵은 압록강 건너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피신한다. 이어 1920년 5월 같은 고향 출신 안봉근(안중근 사촌 동생)의 도움으로 독일의 한 수도원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해 겨울이 되도록 이미륵의 앞날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암울한 미래와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던 이미륵은 어느 날 수도원에 눈이 내리자 고향 해주 송림만의 풍경을 문득 떠올린다.
이미륵의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1946년 독일 현지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나치즘과 전쟁이 할퀴고 간 당시 독일에서 소설은 ‘낯선 나라’ 한국을 처음 알렸다. “수천 년의 역사와 고귀한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는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느꼈고, 진실ㆍ자유ㆍ정의ㆍ사랑으로 사람과 사람 혹은 대륙과 바다를 연결하여 두 세계가 결합하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다”며 독일 평단은 극찬을 쏟아냈다. 이어 소설은 교과서에 실려 많은 독일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았다.
이미륵의 소설은 현재 우리 문단에서 20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큰 성과로 꼽힌다. 그렇다면 독일과 한국을 ‘다리 놓은 소설’의 산실은 어디일까. 또 지금도 기억되고 있을까. 소설이 쓰여진 뮌헨 인근 그래팰핑시에 소재한 옛집은 아쉽게도 20여 년 전 사라졌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그 자리에 동판을 설치하고, 이미륵 묘역을 때마다 찾으며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
“우리가 한양에서 인천을 경유하여 나가사키로 갔다가 이어 홍콩으로 향하고, 다시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고 워싱턴까지 다다른 것이 육로로 1만580리이고, 수로로 2만8,685리이다. 이를 합하면 3만9,265리이다.”
주미공사 박정양의 미국 기행기인 ‘미행일기(1888년)’의 일부.
1888년 1월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은 4만여 리의 육로와 바닷길을 달려 미국 워싱턴 D.C에 도착한다. 조선과 미국의 수교 후 6년 만의 일이었다. 아직 한반도의 정세는 ‘화이질서(華夷秩序)’가 엄존할 때였고, 많은 서양 국가들도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쯤으로 여길 때였다. 박정양 일행이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청나라의 온갖 압박과 무례한 요구가 넘쳐났지만, 마침내 백악관 북쪽 1.3km 지점 피셔하우스에 상주공관을 개설하고 태극기를 내걸어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알렸다.
이듬해 조선은 인근에 단독건물을 얻어 상주공관을 이전한다.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였던 세블론 브라운의 저택이었다. 지금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다. 조선은 이곳을 무대로 필사의 자주외교를 펼치며, 미국식 근대문물과 제도를 통한 근대화를 도모했다. 조선이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한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 참가도 바로 이곳을 통해 준비되고 치러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공사관의 기능도 멈춘다. 이어 한일강제병합과 더불어 건물의 소유권마저 넘어간다. 2012년 10월 문화재청이 다시 공사관을 사들여 무사히 복원공사를 마친 뒤 2018년 5월 마침내 다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연다. 현재 공사관은 우리뿐 아니라 미국 현지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세기 워싱턴 D.C 내 소재했던 30여 개소의 외국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국외사적지란 외국에 소재한 건물 또는 장소 가운데 대한민국과 역사적, 문화적으로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2017년 문화재보호법상 국외소재문화재의 법적 정의(문화재보호법 제2조 9항)가 ‘외국에 소재한 문화재로서 대한민국과 역사적, 문화적으로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개정되면서 편입된 개념이다. 주권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 소재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한반도 너머 더 큰 대한민국’이 바로 국외사적지인 셈이다.
현재 국외사적지는 고구려·발해와 같이 과거 우리의 영토였던 중국과 러시아 일부 지역을 포함해 우리나라와 교류 관계에 있던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 걸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 러시아 지역부터 20세기 초반 미국 등에 정착했던 이민 사회는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고스란히 해외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이를 포함해 독립기념관이 실태조사를 통해 확인한 ‘국외독립운동사적지’는 현재 전 세계 1,000여 개소에 이른다.
근대기에 형성된 국외사적지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것들도 적지 않다. 1919년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충칭에 이르기까지 운영된 임시정부 청사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밝힌 ‘대한민국의 법통’이 깃든 국외사적지다. 20세기 초 일제 식민지배라는 특수한 경험으로 인해 해외에 기원을 두고 있는 정부 기관도 여럿 있다. 중국 지역에서 창설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군은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의 뿌리이며, 미국 지역에서 창설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비행학교는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모두 태생적으로 독립운동의 정통성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국외외교사적지로서 근대기 재외공관도 빼놓을 수 없다. 1876년 조선은 강화도조약 이래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 현지에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대한제국시기까지 주일공사관(1887), 주미공사관(1888), 주영공사관(1901), 주러공사관(1901), 주불공사관(1901), 주청공사관(1903)이 차례로 개설되었다. 재외공관은 국가를 대표해 상대국 현지에 개설하는 관공서로서 주권국가임을 널리 알리고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비록 일제의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활동은 막을 내렸지만, 주권국가로서 세계를 무대로 당당하게 외교활동을 펼쳤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듬해 미국 워싱턴 D.C에 설치한 대한민국의 제1호 대사관 건물도 의미가 남다르다. 이곳은 장면(1899~1966) 초대 대사가 1949년부터 2년간 집무하며 6ㆍ25전쟁에 맞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뉴욕을 오가며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던 최전방 야전사령부였다. 1918년 건립된 이 건물은 지금도 주미대한민국대사관 영사부 건물로 쓰이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국내 대표 건축가들이 설계한 재외공관 건물도 있다. 김수근이 설계한 주인도대사관(1979)과 주미대사관저(1986), 김중업이 설계한 주태국대사관(1990)은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외사적지로서 향후 발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재외 동포 관련 사적지들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1903년 최초로 정책 이민이 실시된 이래 이민자 인구는 크게 늘어나고 있다. 또한 그에 걸맞게 재미 한인들의 미국 내 기여도의 증가와 높아진 사회적 위상만큼이나 재미한인 관련 사적지와 명소도 점차 늘어가고 있다. 때마침 미국 국립공원청도 2016년 선포한 ‘향후 100년을 위한 문화유산 정책과 미래전략’을 통해 미국 내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 등이 반영된 문화유산의 등재 의지를 적극 천명한 만큼, 재미한인들의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현지에서 보다 실효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방안으로 현지법에 따른 등재 추진도 검토되는 상황이다.
현재 국외사적지 가운데 현지에서 활용되는 곳은 전 세계 9개국 23개소가량이다. 독립운동, 외교, 문화예술 분야 등 그 주제와 내용도 다양하며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재외동포와 관련된 사적지는 동포사회의 자긍심 고취와 세대 간 유대감 형성의 구심점 역할은 물론, 현지인들과 소통의 장소로 발전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그로 인해 현지에서 법적 보호를 받으며 등재된 문화재도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과 외국의 다양한 역사적 관계를 보여주는 국외사적지는 한반도 너머로 점차 지형이 확대되고 있다. 이제 소재국과 대한민국 간 ‘공동유산’으로 인식하고 함께 관리하는 방안도 적극 모색할 때다. 오늘날 세계와 우리는 결코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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