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집을 짓겠다고 찾아왔다. 건축가는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 온 부부였다. 캠퍼스 커플로 맺어진 둘은 첫 아이가 11개월 때, 아이를 데리고 5개월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는 뭐 먹일 건데' '아이가 아프면 어떡할래'라는 우려와 만류에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닥치면 다 하게 된다'며 감행했다. 그 아이가 자라 초등학생이 됐지만 부부는 아직도 부모님께 '언제 철들래?'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내는 만화책을 남편은 영화를 사랑한다. 건축가는 "이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닮은 집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설계를 맡은 박현근 재귀당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틀, 규범을 상징하는 네모 반듯한 사각형을 사선으로 잘랐다. 쪼개진 두 매스 중 작은 덩어리는 높이를 낮춘 뒤 살짝 떨어뜨렸다. 경기 용인 기흥구의 '내맘이당(堂)(대지면적 246.00㎡, 연면적 190.83㎡)'의 외관 디자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두 동 중, 5평 남짓한 별관은 주로 남편 이상민(40)씨가 영화를 감상하는 취미 공간으로, 본관은 네 식구의 생활 공간으로 쓴다. 건물 사이 빈 공간은 집의 마당이 됐다.
"숨기 편한 집을 지어주세요"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며 집을 짓자고 말을 꺼낸 건 남편이었다. 네 식구는 직전까지 서울의 20평대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이들에게 '뛰지 마', '쿵쿵대면 아랫 집에서 싫어해' 같은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답답하기는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밤늦게 영화 한 편 보려 하면 아이들을 깨울까 눈치를 봤다.
아내 김근영(40)씨는 건축가와 만난 자리에서 "숨을 곳이 많은 집"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공간이 필요했다. 부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일정한 거리 두기는 필요한 법이다.
내부는 그래서 숨을 곳 천지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남편은 퇴근하고 아이들을 재운 뒤 '아빠 집'으로 불리는 별관으로 건너간다. 볼륨을 높이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한 공간으로, 방음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손님이 오면 술을 마실 수 있는 바로 변신한다. 아이들에게 가끔 빼앗기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1층 벽면 책장을 열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비밀의 방'이 나온다. 아내가 쏙 숨는 공간이다. 아이들에게도 비밀이었지만 얼마 못 가 들켰다. 아이들은 엄마가 안 보이면 이 문부터 열고 본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비밀의 방이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에 위안이 된다. 아내는 이곳에서 만화책 읽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에게는 집 곳곳이 놀이터고 '숨숨집'이다. 초등학교 1학년 첫째의 방은 가운데가 뻥 뚫린 벽으로 분리돼 있다. 한쪽에는 침대, 다른 한쪽에는 책상을 두고 넘나 들며 지낸다. 그 자체가 재미있는 놀이다. 첫째는 벽이 만든 턱에 누워 책 읽기를 좋아한다. 다섯 살 둘째 방은 한쪽에 놓인 계단이 다락으로 통한다. 다락에 놓인 트램펄린 위에서 퐁퐁 뛰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한다.
네모 반듯하지 않은 집, 네모 반듯하지 않은 삶
집의 외장재는 지붕과 외벽을 밝은 골강판으로, 건물이 마주 보고 있는 면은 이와 대비되는 따뜻한 느낌의 탄화목으로 마감했다. 사각형의 매스, (지붕을 포함하면) 사각뿔을 사선으로 자른 외관의 형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본관과 별관이 마주 보는 배치는 기능적인 이점이 있다. 마주 보는 건물은 서로를 가려주며 외부 시선을 차단한다. 집이 도심의 택지지구 진입로에 접해 있어도 별도의 담장이 없는 이유다.
특히 본관과 별관 사이에 주차를 하면, 도로에서 보이지 않는 사적인 마당이 형성된다. 진입로 반대편은 법화산 자락이라, 마당은 녹지를 향해 널려 있는 모양이 된다. 올여름 아이들은 이 마당에 4m 길이 대형 수영장을 놓고 신나게 놀았다. 어른들도 매일매일 캠핑하듯이 마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텃밭이나 잔디를 갖추지 않더라도 주택살이의 재미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집은 2층 규모의 본관과 단층인 별관을 합해 약 60평이다. 본관 1층은 공용 공간으로 비밀의 방을 제외하고는 문 하나 없이 탁 트여 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아이들 놀이방으로 쓰는 공간이 군데군데 뚫린 벽으로 구획돼 있고, 정면에는 주방과 응접실이 자리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부부와 아이들의 침실, 거실, 그리고 작은 다락이 나온다.
내부 공간은 삐뚤빼뚤한 선들로 만들어진 다각형의 집합체다. 똑같은 모양의 방이 하나도 없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면 사선이 서로 교차한다. 건축가는 "'틀을 자른다'라는 느낌을 매스에 그대로 표현했고, 이때 발생한 사선 면으로 인해 주요 실이 네모 반듯한 것이 하나도 없다"며 "아이들한테 이런 사선들이 자유롭게 겹쳐져 있는 공간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강한 사선으로 이뤄졌지만 생활하는데는 어려움이 없다"며 "기존의 틀을, 삶을, 가치관을, 세계관을 뛰어넘거나 벗어나도 아무 무리가 없듯이 이곳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틀에 익숙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가족이 직전에 살던 집은 서울에서도 사교육을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동네에 있었다. 두 돌이 지나면 영어를, 세 돌이 지나면 중국어를 가르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부부의 교육관과 맞지 않았다. "'너는 왜 안 시켜' '아직도 안 해' 이런 눈길이 너무 부담이었어요. 여기 오니까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서 좋아요."
부부는 아이들이 이 집에서 "자유롭게 생각하며 자라기"를 바란다. "세상은 넓고, 재미있는 일도 많고, 즐거운 일도 많거든요. 그런데 저도 그랬고, 아이들 보면 틀에 갇혀가지고 그 안에서 순위를 재고 너무 힘들게 살아요. 그러지 말고 자유롭게, 좀 무모한 것 같더라도 도전해보는 아이들이 되면 좋겠어요."
공간은 생각을 지배한다. 지난 5월 이사 와, 이 집에 반 년쯤 살았을 뿐이지만 아이들에게선 벌써 '네모 반듯하지 않은 집'에 사는 티가 난다. "어린이집에서 그림을 그릴 때 많은 아이들이 네모난 아파트를 그리고 우리 집이 몇 층이라고 표시하는데, 둘째만 집을 세모로 그린다고 하더라고요." 마음 가는 대로 살기 머뭇거리게 될 때, 이 집의 주문이 효과가 있는 게 틀림없다. "내맘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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