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독립해 혼자 사는 30대 직장인입니다. 강박증을 앓는 친언니와 한집에서 20여 년 살았는데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큽니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언니와 마주치거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너무 힘들어요.
제가 일곱 살 때부터 언니의 강박 증상이 시작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언니가 강박적으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물체는 바로 '저'였어요. 처음에는 제 몸과 닿으면 씻는 강박적 행동을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심해져 저와 같은 공간에 있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용한 적 있는 집 안의 모든 물건을 사용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물건을 따로 사용했으며 그마저도 사용 전에 엄청난 소독 과정을 거쳤어요.
특히 화장실이 한 개뿐인 집에서 살았는데 본인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2시간에 걸친 소독 과정을 거쳐야 했어요. 늘 너무나도 요란하게 시끄러웠고, 저는 긴 시간 동안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해 불편했으며 그 모든 것이 아무 잘못 없는 나 때문이라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한집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순간에 저는 욕을 들었습니다. 비켜주지 않고 같이 욕을 하면 저를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마저도 저와 닿으면 안 되기에 비닐장갑을 찾아 끼고 때렸습니다. 서럽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 미치도록 증오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하소연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이 언니 걱정으로 우울증을 앓는 것처럼 보여 많은 부분을 참고 넘기며 지내 왔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처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언니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저보다 늦게 눈치를 챘고, 저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 정도로 훈화를 할 뿐이었어요. 제가 초등학생일 때 강박증에 대해 알게 돼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부모님께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옛날 분들이라 자식에게 낙인이 찍힐까 데려가지 않으셨어요. 이후에 증상이 심해지자 부모님도 고민하셨지만 그때는 언니가 거부해 치료가 무산됐습니다.
언니와 저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 각자 독립해 현재는 같이 살지 않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다 보니 미움도 많이 옅어졌어요. 저도 사회 생활을 하며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강박증을 가진 언니 또한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부모님이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해서 증상이 심해지고 나한테 심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2년 전 가족 네 명이 함께 밥을 먹은 뒤로, 얼마 전 다시 같이 식사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2년 전에도 언니와 서로 구석에 앉아서 최대한 거리를 두었는데,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을 정도면 언니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는 언니가 저한테 한두 마디 말도 걸어서 놀랐어요. 그러자 부모님이 기뻐하시면서 자주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겁니다. 그때 저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했는데, 내색하지 못했어요.
제 모든 상처에 대해 부모님은 흐린 눈을 하고 얼버무려 덮는 것 같았습니다. 언니와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지 혼란스러워졌어요. 다 이해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제 마음이 편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양선영(가명·34·회사원)
선영씨, 어린 시절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았는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려는 가족을 보면서 화가 나고 마음이 많이 불편했을 것 같아요. 선영씨 마음속에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억울한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겁니다. 당신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 같이 고민해봅시다.
자매가 같이 살면서 다툴 때도 있고, 서로 싫은 면도 있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요. 마음이 안 맞을 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선영씨와 언니 사이 문제는 어떤 오해나 갈등으로 생긴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그저 선영씨 언니가 겪는 질병의 증상으로 생긴 문제입니다. 선영씨 언니는 오염에 대한 강박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닿거나,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공포 수준의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이런 상황을 가급적 피하려 합니다.
피할 수 없을 경우에는 본인만의 방식으로 불안을 낮추려고 합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신과 타인, 환경을 통제하려 들어요. 언니가 화장실을 사용할 때 2시간씩 걸렸던 것도, 아마 자기만의 순서대로 다 닦아야 했기 때문일 거예요. 지나치게 통제적이지만 꼭 그렇게 적용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거죠. 안 그러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강박증을 보통 '마음의 감옥'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증상이 심해지면 일상 생활이 어려워질 정도로 고통스럽지요.
특히 강박이 있는 사람들은 감정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괴롭든, 버겁든, 싫든 자기가 잘 처리하지 못할 어떤 불편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이 감정을 알아차리고, 인식하고, 표현하고, 해결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불편한 감정이 불안으로 감지되고 증폭되면 과도한 불안을 낮추기 위해 그 상황을 회피하거나 또는 부적절한, 과도한 행위로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거죠. 예를 들면, 동생이 미울 때 일반적인 사람은 동생과 싸우거나 "나 너 진짜 싫어", "너 왜 이렇게 미운 짓을 하니"라며 말로 표현을 하죠. 동생이 지저분해 보이면 "더러우니, 씻고 와"라고 하든가요. 하지만 강박 증상이 있는, 감정을 제대로 못 다루는 사람은, 동생이 미울 때 이를 말로 드러내기보다는 동생이 지나간 자리를 몇 시간씩 닦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합니다.
선영씨는 언니에게 내내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보다 더 강하게 억울하고, 서럽고, 분노를 느꼈던 상대는 아마 부모님이었을 겁니다. 선영씨가 부모님보다 먼저 언니의 병원 치료를 요구했지만 부모님은 이를 거부했죠. 선영씨가 언니와 살기 힘들다는 신호였는데 부모님은 신호를 못 알아차렸어요. 부모님이 자기가 보낸 신호에 무감각하니까 어린 선영씨는 보호받지 못하고 무시받고 거절당했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선영씨 부모님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아이가 어렸을 때 치료를 시작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옆에서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물론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고 걱정했던 사람은 부모님이지요. 선영씨 가족이 겪었던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그 누가 쉽게 판단하고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부모님이 당장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해도 둘째인 선영씨의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정서적인 보호를 해줬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없었다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부모님은 게다가 선영씨에게 '사이좋게 지내라'는 식으로 얘기했어요. 하지만 언니의 강박은 누군가가 양보를 하거나, 누군가가 조금 참아준다든가, 이런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선영씨 내면에 그동안 얼마나 억울한 감정이 쌓였을까요. 보호받고 편하게 지내야 할 집에서 힘든 마음을 견뎌야 했던 외로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언니의 증상을 다 받아내야 했던 괴로움, 아무도 의도적으로 선영씨를 나쁘게 대한 사람은 없지만 어린 선영씨가 겪었던 고통은 아동학대를 당한 것과 다름없다고 봅니다. 제가 어린 시절 선영씨를 만난다면, "너 진짜 힘들겠다", "언니가 치료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그런 거지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내가 좀 더 잘하면 언니가 안 그럴 텐데' 이런 생각을 절대 하지 마. 너 때문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선영씨 가족은 유독 서로에게 감정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 문제도 밖으로 꺼내놓고 한 번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언니한테 '네 증상과 그로 인한 어려움이 너무 심하다. 너도 괴롭고, 동생한테도 이게 할 짓이 아니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언니 혹은 부모님 누구도 선영씨에게 '어릴 때 네가 그런 일을 겪게 한 게 너무 미안하다'거나 '네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죠.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을 같이 먹자'고 하니 선영씨 내면의 상처, 분노가 건드려진 것 같아요. 물론 부모님 입장에서는 예전에 비해서 많이 안정을 찾은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고 이제라도 가족이 모여 식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지요. 그런데 선영씨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고, 내 마음속 상처는 그대로인데 얼렁뚱땅,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강한 거부감이 들고 화가 나는 거죠.
저는 선영씨에게 앞으로의 가족 관계는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주도적으로 결정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어요. 강박 증상이 있던 언니와 함께 살 때는 선영씨가 어렸을 때고, 선영씨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지금은 선영씨도 성인이고 독립을 했습니다. 만일 부모님이 가족끼리 만나자고 요구해도, 그날 선영씨 마음이 괜찮다면 가고 내키지 않는다면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선영씨도 이제는 가족이라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렇게 하면 언니나 부모님이 어떻게 나올까, 어떻게 반응할까 전전긍긍하지 말고 선영씨 마음이 시키는 대로 결정했으면 합니다. 배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막 대하라는 말이 아니라, 선영씨가 언제나 자기 마음의 주체가 되어 결정하라는 뜻입니다. 언니에게도 '나 어릴 때 언니가 나한테 너무 심하게 한 게 생각나서 오늘은 내가 언니 얼굴 못 보겠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강박증 환자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합니다. 본인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까요. 하지만 강박이 치료가 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머지 배우자나 자녀, 형제, 자매가 느꼈을 고통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선영씨는 오랜 시간 고통스러웠을 것 같아요. 정말 잘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혹여나 선영씨 마음 깊은 곳에 '진짜 나 때문에 언니가 병에 걸렸나' '내가 혹시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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