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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곡에 가을이 쌓이고 느린 시간이 흐른다

입력
2021.11.10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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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청송 주왕산면 절골계곡과 주산지

청송 주왕산 주산지의 가을 풍경. 왕버들과 단풍이 오른 산자락이 수면에 비치고 물속에서 잉어 떼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멈춘 듯 느린 시간이 흐른다.

청송 주왕산 주산지의 가을 풍경. 왕버들과 단풍이 오른 산자락이 수면에 비치고 물속에서 잉어 떼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멈춘 듯 느린 시간이 흐른다.

지역의 명소를 행정 지명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영월군의 한반도면, 양구군의 국토정중앙면, 경주시의 문무대왕면이 그런 경우다. 경북 청송의 부동면도 100년 넘게 사용해온 지명을 2019년 주왕산면으로 변경했다. 외지인에게 청송보다 주왕산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니, 군의 동쪽에 있는 면이라는 의미의 부동면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 말하자면 지역구에서 전국구로 발돋움하기 위한 지명 변경이다.

주왕산은 옛날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가 당나라에 반란을 꾀하다 실패해 이곳에서 은둔했다는 데서 산 이름의 유래를 찾는다.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굳이 시대에 맞지 않는 사대주의의 명성에 기댈 필요가 없다. 자체로 멋지고 훌륭한 산이다.


주왕산의 속살을 보려면 절골계곡으로

국내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은 우람하면서도 부드러운 바위봉우리와 깊고 수려한 계곡이 절경을 빚어 영남 제1의 명승으로 대접받아 왔다. 주왕산(720.6m)을 중심으로 그보다 높은 태행산, 대둔산, 명동재, 왕거암 등이 말발굽 모양으로 자연 성곽을 형성해 멋진 산세를 뽐낸다. 약 7,000만 년 전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굳은 용결응회암이 특색 있는 경관을 이뤄 국내 3대 암산으로도 꼽힌다.

청송 주왕산 전경. 우람하면서 부드러운 바위봉우리가 절경을 빚는 명산이다.

청송 주왕산 전경. 우람하면서 부드러운 바위봉우리가 절경을 빚는 명산이다.

여러 등반 코스가 있지만 탐방객 대부분은 주왕계곡 코스로 몰린다. 입구에 주차장과 편의시설이 잘 정비돼 있고, 대전사를 지나면 깎아지른 바위 절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용추폭포, 용연폭포 등이 절경을 자랑하는 코스다.

조금 한적하게 주왕산의 속살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남동쪽 산줄기의 절골계곡을 찾는다. 계곡을 거슬러 가메봉(882m) 정상까지 올랐다가 주왕계곡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전체 13.5㎞, 7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러나 완주하는 이들은 드물고 대개는 입구에서 3.5㎞ 떨어진 대문다리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계곡을 따라 걷기 때문에 오르막이 거의 없는 순탄한 길이다. 등산로라기보다 산책로에 가깝다. 그럼에도 계곡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협곡을 형성하고 있어서 깊은 산중의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문다리부터는 본격적인 등반 코스다.

주왕산 절골계곡의 단풍. 예년만 못하다지만 탐방객의 탄성이 끊이지 않는다.

주왕산 절골계곡의 단풍. 예년만 못하다지만 탐방객의 탄성이 끊이지 않는다.


주왕산 절골계곡 탐방로는 계곡과 나란히 가는 대체로 순탄한 길이다.

주왕산 절골계곡 탐방로는 계곡과 나란히 가는 대체로 순탄한 길이다.

절골계곡 탐방로는 ‘운수(雲水)길’로도 불린다. 구름과 물을 벗 삼아 힐링하며 걷는 길이니, 좋은 기운을 담아가는 코스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운수암’이라는 작은 절이 있어서 절골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의 문인 권이복(1740~1819)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이 좌우에 병풍처럼 나열되어 저절로 십리돌병풍을 형성하였다. 십리길이 끝나는 곳에 평탄한 언덕이 하나 있으니 바로 운수암이 위치한 곳이다’라고 기록한 데서 유래를 찾는다. 이후 권렴, 이상정 등 또 다른 문인들이 이곳을 ‘운수동천’이라 불렀다. 동천(洞天)은 경치가 빼어난 곳에 붙이는 말이다.

평소 한적한 절골계곡도 단풍철에는 탐방객으로 제법 붐빈다. 주왕산국립공원 측은 14일까지 하루 입장 인원을 1,35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주말 산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국립공원공단 예약 시스템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한다. 예약 인원이 차지 않을 경우에만 현장 입장이 허용된다. 주차장이 협소해 단풍철에는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길가에 차를 대고 걷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평일인 지난 5일에도 계곡 입구 길가에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왕산 절골계곡 맑은 물에 가을 색으로 변신한 주변 풍광이 비치고 있다.

주왕산 절골계곡 맑은 물에 가을 색으로 변신한 주변 풍광이 비치고 있다.


주왕산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돼 있다. 약 7,000만 년 전 분출한 화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주왕산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돼 있다. 약 7,000만 년 전 분출한 화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절골계곡 상류 계곡에 낙엽이 잔뜩 덮였다. 일부 등산객은 맨발로 걷기도 한다.

절골계곡 상류 계곡에 낙엽이 잔뜩 덮였다. 일부 등산객은 맨발로 걷기도 한다.

절골계곡 분소를 통과하자마자 평범한 농촌마을 풍경이 갑자기 깊은 산중으로 변한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 양편으로 기암괴석이 치솟아 있다. 산허리로 길을 내기 힘든 지형이어서 탐방로는 자연스럽게 계곡을 따라 간다. 일부 구간에 목재 덱과 다리가 설치돼 있지만 대개는 개울과 나란히 자갈길을 걷고 때로는 징검다리로 얕은 여울을 건넌다. 소풍 가듯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올해 단풍은 솔직히 아주 고운 편은 아니다. 지난달 갑작스런 추위가 들이닥치면서 색이 오르기도 전에 나뭇잎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곡 곳곳에 흩뿌려진 가을 색에 탐방객의 표정은 모처럼 화사하게 피었다. 오랫동안 나들이를 미뤄오다 ‘단계적 일상 회복’ 시행으로 간만에 콧바람을 쐬는 터라 계절이 주는 작은 선물에도 감탄사 연발이다. 맞은 편에 사람이 오면 다시 마스크를 올리는 수고쯤이야 기꺼이 감수할 익숙해진 일상이다.

계곡을 거슬러 오를수록 산세는 더 순해지는데, 주변 풍광은 깊이를 더해간다. 반환점인 대문바위 가까이 다다르면 넓은 암반에 고인 계곡물을 빨갛고 노랗게 물든 낙엽이 가득 덮고 있다. 수면에 떨어진 나뭇잎이 물살 따라 맴돌이하다가, 꼬리를 물고 천천히 흐른다. 가을이 쌓이고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위아래가 온통 가을 색이다. 잠시나마 다른 세상, 다른 시간에 떨궈진 것 같은 황홀한 착각에 빠진다.

절골계곡 상류 계곡에 오색 단풍이 떨어져 화려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절골계곡 상류 계곡에 오색 단풍이 떨어져 화려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나뭇잎이 가득 쌓인 절골계곡 상류. 가을이 쌓이고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나뭇잎이 가득 쌓인 절골계곡 상류. 가을이 쌓이고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단풍으로 뒤덮인 계곡을 배경으로 등산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단풍으로 뒤덮인 계곡을 배경으로 등산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주왕산을 위시한 청송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절골계곡을 감싼 바위는 화산재와 부석이 엉겨붙어 형성된 용결응회암으로 분류된다. 고온의 용결응회암이 냉각·수축되며 수직 절리가 발달하고, 암석이 떨어져 나가며 협곡이 형성됐다고 한다. 탐방로 주변에도 이런 화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주와는 또 다른 화산 지질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도 이 길을 걷는 재미다.

절곡계곡 코스보다 더 한갓진 곳을 찾는다면 주왕산 동북쪽 월외 코스를 추천한다. 청송읍 월외리 마을에서 너구마을까지 이어지는 약 3.5㎞ 코스로 노루용추계곡으로도 부른다. 너구마을까지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지만 계곡과 산세는 깊은 산중이다. 길 중간 있는 달기폭포와 월외폭포도 볼거리다.

가을에 빠지다, 명불허전 주산지

주산지는 이맘때 주왕산에서 탐방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 물속에 뿌리를 내린 30여 그루의 왕버드나무가 몽환적인 풍경으로 빚는다. 고요하게 안개가 일렁거리는 수면에 최고 300년 된 왕버들의 위풍당당한 몸통과 가지가 비쳐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산등성이로 솟은 해가 서서히 짙은 안개를 밀어내면, 울긋불긋하게 물든 주변 산자락까지 물속에 내려앉아 한 폭의 가을 수채화를 완성시킨다.

주산지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주차장에서 약 1km 숲길을 걷는다.

주산지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주차장에서 약 1km 숲길을 걷는다.


이맘때 주산지는 단풍과 안개가 어우러져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이맘때 주산지는 단풍과 안개가 어우러져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왕버들과 단풍으로 물든 산자락이 비친 주산지에 잉어 떼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왕버들과 단풍으로 물든 산자락이 비친 주산지에 잉어 떼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물속에 뿌리 내린 왕버들이 잔잔한 수면을 기준으로 데칼코마니 작품을 그린다.

물속에 뿌리 내린 왕버들이 잔잔한 수면을 기준으로 데칼코마니 작품을 그린다.


주산지는 1720년 8월 조선 경종 원년에 착공해 이듬해 10월 준공한 인공 저수지다. 길이 200m, 너비 100m 남짓 하고 평균 수심은 8m 정도로 아담한 편이다. 약 3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산지는 가뭄에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비결은 바로 주왕산 특유의 화산 지질에 있다. 화산재가 엉겨붙은 치밀하고 단단한 암석이 저수지 아래에 있고, 그 위에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굳어진 응회암과 퇴적암이 쌓여 전체적으로 큰 그릇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지층이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흘려 보내기 때문에 늘 수량이 풍부하다는 게 지질학적 설명이다. 정중동, 물도 시간도 멈춘 듯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흐른다.

주차장에서 저수지까지는 약 1㎞, 황토 시멘트로 잘 다져진 걷기 편한 길이다. 깊은 산속 작은 저수지 하나 보겠다고 몇이나 갈까 싶지만, 이른 아침부터 주차장이 모자랄 정도로 붐빈다. 사진작가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 여행객까지 다양하다. 약 1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노벨 청송’ 리조트와 ‘청송한옥민예촌’ 투숙객이 많기 때문이다.

주산지의 반짝이는 수면과 대조를 이루는 단풍잎이 유난히 곱다.

주산지의 반짝이는 수면과 대조를 이루는 단풍잎이 유난히 곱다.


절골계곡과 주산지로 가는 도로변에서 농가에서 직접 딴 사과를 판매하고 있다.

절골계곡과 주산지로 가는 도로변에서 농가에서 직접 딴 사과를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꼭두새벽부터 오들오들 떨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해가 뜨고 난 후에 가도 늦지 않다. 요즘같이 일교차가 큰 시기에는 오전 8시까지도 안개가 짙고, 9시는 넘어야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절골계곡과 주산지로 가는 길 주위는 온통 사과나무 과수원이다. 주산지 주차장과 도로변에 농가에서 직접 판매하는 매장이 즐비하다. 일교차가 큰 청송의 사과는 아삭아삭하면서도 시원한 단맛을 자랑한다. 산행 중 간식으로 그만이다.

청송=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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