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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19>파주와 청주의 피란민 수용소 마을
피란민촌의 시작
제국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끝난 1945년부터 6·25 전쟁이 끝난 1953년에 이르는 8년 사이, 500여 만명의 시민들이 한반도 북부를 빠져나와 한국으로 피란왔다. 출신 지역에 따라 피란민의 수용 지역을 지정한 정부 지침이 1950년 말에 내려지자, 피란민, 월남민, 또는 자조적인 심정을 담은 표현인 '삼팔 따라지'들은 한국 전역에 배치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나의 아버지 집안은 평안북도에서 월남해 서울·경기 지역에 머물다가 부산으로 내려간 사례다.
이들 피란민이 자리 잡은 지역은 해방촌·희망촌·토막사·소막마을·수용소 등으로 불렸다.
우선 해방촌은, 8·15 해방 및 분단, 6·25 전쟁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본 등지의 시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현재 해방촌이라고 하면 서울 남산 남쪽 기슭의 해방촌이 유명하겠지만, 사실 해방촌이라는 지명은 전국에서 확인된다.
희망촌은 강원도 원주에서 확인되는 지명으로, 이 지역의 사업가였던 이재춘 선생이 30채의 건물을 지어 이들 피란민을 수용했다고 해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뜻으로 희망촌이라 불렸다. 희망촌의 위치는 옛 원주역에 인접한 산기슭으로, 곳곳에서 원주로 모여든 피란민들을 서둘러 수용할 수 있도록 이렇게 철도역 근처에 마련한 것 같다. 이렇게 좋은 뜻을 지니고 출발한 희망촌은 역 앞에 위치한 허름한 주거지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성매매집결지로 바뀌었고, 원주역이 시 외곽으로 이전한 지금은 도시재생의 대상이 되어 있다.
토막사(土幕舍)는 벽돌보다 큰 사이즈로 흙을 떠서 지은 막사라는 뜻으로, 충청남도 아산시의 외곽에 마련되었다. '운용3리 토막사'와 '선창3리 토막사'라는 버스정류장에 그 이름이 남아있다. 막사(幕舍)라는 이름에서, 피란민 수용소 건물의 형태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산의 '탕정 수용소'에 정착한 피란민들은 동료 피란민들을 상대로 된장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렸고, 훗날 이곳은 '된장 골목'이라 불리게 되었다(디지털 아산문화대전).
소막마을은 부산 우암동의 항구 근처에 형성된 피란민 정착촌으로, 소를 넣은 막사 건물을 피란민 수용소로 사용했다고 해서 마을이름이 이렇게 붙었다. '광장'을 쓴 소설가 최인훈은 1950년에 LST(Landing Ship Tank)를 타고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란온 뒤, '도살장의 축사'에 묵었다고 회고한다.
"이곳 사람들은 피란의 첫날부터 우리를 따뜻이 받아들였고(LST로 부산에 닿은 우리는 곧 교외의 어느 해변에 있는 도살장의 축사로 옮겨져서, 칸막이가 된 시멘트 바닥에서 그날 밤을 보냈으므로 물리적인 뜻에서 '따뜻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때도 가마니 여러 장씩을 주었고, 마음 '적'으로는 의심할 나위 없이 따뜻하였다)" ('화두 1' 123-4쪽).
그가 도살장의 축사로 기억하는 건물들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이들 건물은 사실 식민지 시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소를 보내기 전에 질병 유무를 검사하던 검역소였다. 이 소막마을에는 함경도 흥남에서 냉면 영업을 하던 분들이 피란 와 개업한 밀면 가게도 여전히 영업하고 있어서, 이 마을의 유래를 증언해준다.
그 많던 피란민 수용소들
내가 확인한 지명들 가운데 피란민과 관련해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확인되는 것이 '수용소'다. 충청남도 아산의 '탕정 수용소'처럼 '수용소'라고만 불리는 곳도 있고, 앞서 이 연재에서 소개한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의 '수용소 마을'과 경상북도 영주시의 '숫골' 즉 '수용소 골'처럼 뒤에 수식어가 붙은 곳도 많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는 '수용소 마을'과 '수용소 들'이라는 지명이 함께 존재했다. 이 '수용소 들'이 지금의 첨단 도시인 마곡 지구가 되었다. '수용소'라고 하면 많은 분들은 6·25 전쟁 당시 경상남도 거제에 조성된 포로수용소를 떠올리시겠지만, 수용소라고 불리던 곳은 전국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피란민들이 살았던 수용소 마을이나 수용소 건물이 남은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지역마다 수백, 수천 명의 피란민이 한꺼번에 몰려들다보니, 제대로 된 건물을 만들지 못하고 천막·초가·막사 등에 이들을 임시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에 머물던 피란민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는 했고, 이들이 떠난 뒤의 수용소 마을은 갑작스럽게 생겨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쉽게 사라졌다.
수용소 마을로 유명했던 전라북도 군산시의 해망동·장미동이나 강릉시 주문진읍의 주문진역 광장 예정지 등은 마을이 통째로 철거되어 사라진 경우다. 개인적으로는, 3년 전에 헐려서 내년에 아파트단지 준공을 앞두고 있는 아산시 모종동의 수용소 마을을 답사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2018년이면 내가 전국 답사를 시작한 뒤였기 때문에, 그때 내가 이 마을의 존재를 알았거나 수용소 마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기록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개발·재건축은 막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귀중한 건물·마을·길이 있었음을 철거 얼마 뒤에 알게 되었을 때처럼 안타까움을 느끼는 일은 없다.
1992년에 1기 신도시로 조성된 경기도 고양시 일산신도시의 대화·일산·주엽동 등의 옛터에도, 지리적 관계로 피란민이 많이 정착해서 수용소·새말·통일촌·문화촌 등의 수용소 마을을 이루었다. 피란민들이 정착해서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새말, 이들이 수용되어 있던 피란민 수용소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조를 받아 문화주택으로 개조했다고 해서 문화촌이라 불렸다 한다. 하지만 일산신도시 개발 때 이들 피란민 수용소 마을은 모두 사라졌다. 현재 일산신도시 가운데 조성된 문화공원이 이 수용소 마을인 문화촌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며, 공원 한쪽에 옛 마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한편 군산시 구암동과 삼학동, 강릉시 주문진읍 등대마을, 인천시 만석동, 아바이마을이라 불리는 속초시 청호동 등에는 피란민 분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계시다고 한다. 하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수용소 건물은 워낙에 급하게 지어진 것이다보니, 그 후 건물을 헐고 새로 짓거나 증개축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이들 지역에서도 수용소 건물의 원형을 찾기는 쉽지 않다.
경기 파주시 조리읍 장곡3리 '수용말'
최근, 경기도 파주시와 충청북도 청주시에 남아있는 피란민 수용소 건물들을 답사했다. 현지 언론사에서 기사화한 내용을 확인하고는, 기사화된 뒤로 혹시라도 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품고 서둘러 출발했다.
우선은 파주시 조리읍 장곡3리의 피란민 수용소 건물.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보면, 파주시에 들어서기 전에 우선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의 해방촌을 지난다. 이곳도 피란민 수용소였을 터이지만, 지금은 신도시로 개발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고양시를 지나 파주시로 접어들면, 미군부대 캠프 하우즈가 주둔하다 떠난 조리읍 봉일천리에 조금 못미쳐서 장곡2리에 다다른다. 평지에 자리한 장곡2리는 당(堂)나무도 있는 전통적인 마을로 보였고, 장곡3리의 수용소마을은 이 장곡2리 뒤쪽의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피란민 수용소를 원래 마을이 있던 평지가 아니라 마을 외곽의 산기슭에 조성한 것일 터이다.
이 장곡3리가 중요한 것은, 이곳에 '수용말' 즉 '수용소마을'이라는 지명과 피란민 수용소 건물이 한 세트를 이루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수용소 마을과 관련된 지명은 많이 전하고, 원형대로이든 증개축되어서이든 수용소 건물이 남아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지명과 원래 건물이 세트를 이루어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현지 언론에서 보도한 건물은 아직 원형대로 남아 있고(2018년 6월 24일자 경기일보 '파주 장곡리 움집을 아시나요… 6·25피란민들이 한동안 모여 살던 곳'), 기사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피란민 수용소 건물로 추정되는 집을 좀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충북 청주시 피란민 수용소들
한편 충청북도의 중심지였던 청주시에도 피란민 수용소가 여럿 조성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무대가 된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의 수암골일 터이다. 이곳은 대부분의 피란민 수용소가 그렇듯이 산기슭의 빈민촌으로서 최근까지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으나, 드라마의 무대가 되면서 마치 서울 남산의 해방촌처럼 핫플레이스가 되어버렸다. 마을 곳곳에서 만난 주민분들의 표정에서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관광지가 되어버린 지역의 주민분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당혹감과 분노가 읽혔다.
최근 긴급하게 청주를 방문한 목적은, 수암골처럼 핫플레이스가 되지 않은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과 흥덕구 운천동에 원형대로 남아있다고 현지 언론에서 보도한 피란민 수용소 건물이 아직 남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방문한 영운동의 피란민 수용소 건물은, 수용소 마을의 일부가 연립주택으로 개조되면서 그 뒤쪽에 가려진 때문에, 그 뒤로 대부분의 청주 시민분들께 잊혀진 듯했다. 이 수용소 건물의 존재를 보도한 현지 언론에서는 수십 년만에 귀중한 건물의 존재가 확인되었다는 뉘앙스로 보도했다(2018년 12월 17일자 충청타임즈 '71년 만에 다시 찾은 청주 영운동 옛 피란민수용소', 2018년 12월 19일자 충청타임즈 '청주 70여 년 된 옛 피란민수용소 '고스란히'' 등).
하지만 답사 현장에서 만난 주민분께서는 이와는 다른 취지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예전에는 택시기사에게 '청남연립 가자'고 하면 못 알아들었고, '수용소 가자'고 해야 알아들었어." 현지 분들께는 이곳이 피란민 수용소 마을이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외지인의 유입이 많은 청주의 특성상,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자명한 사실이 영운동 바깥의 다른 청주 시민들께는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답사팀과 같은 외부인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다른 주민분께서는 "이 건물을 통째로 구입할 거 아니면 다시는 오지마"라고 농담반 진담반의 말씀을 던지셨다.
영운동의 피란민 수용소 건물에 비해, 운천동의 피란민 수용소 마을은 상대적으로 청주 현지에서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이 지역 토지의 원 소유주였던 청주시가 토지를 민간에 불하하면서 주거 환경 개선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점, 운천동 일대의 각종 재건축·재개발 사업에서 소외되어 왔다는 점 등이 주로 강조되고 있다(2006년 6월 8일자 충북인뉴스 '청주에 이런 곳도 있었네', 2010년 12월 16일자 충북인뉴스 '[운천동 피란민촌 보고서]① 무심천보다 낮은 그곳에 게딱지처럼 엎드린 삶' 등). 운천동 피란민 수용소 마을을 답사하면서 "재건축·재개발은 그 사업이 가장 필요한 지역을 피해간다"는 말을 떠올렸다.
나가며
이번 글에서는 최근 긴급하게 답사한 피란민 수용소 건물들을 소개했다. 내가 현존하는 모든 피난민 수용소 건물·마을을 답사했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이 글을 계기로 더 많은 피란민 수용소 건물·마을이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최근 답사한 파주와 청주의 피란민 수용소 건물은 원형이 남아있는 사례로서, 현대 한국의 탄생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피란민들의 역경을 증언하는 귀중한 도시화석이다. 이들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들 건물이 붕괴되거나 철거되기 전까지 더 많은 한국 시민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지고 기록되어, 분단·전쟁·국제원조를 통해 탄생한 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경에 가득찬 탄생 초기 과정을 더 많은 시민들께서 실감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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