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여행지에서 발견한 힘이 되는 문구
어떤 장소는 명징한 문장 하나로 기억된다. 그것으로 그 장소, 그 나라를 기억하고 다시 한번 가보리라 다짐한다. 가끔은 뾰족한 화살촉이 되어 가슴을 뚫고, 때론 또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여행자의 자기암시적 기억법이다.
멕시코 플라야델카르멘의 “Live Life”
유명 관광지보다는 덜 도도한, 그런 곳에서 고삐 풀린 히피의 나날을 누리길 원했다. 그래서 택한 장소가 칸쿤에서 68㎞ 남짓 떨어진 플라야델카르멘. 탕탕의 다리 부상으로 장기 체류한 이곳에서 한 일이라곤 틈날 때마다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하고 이대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불안에 접어 들었을 때, 누군가 해변에 써 놓은 글귀 하나, ‘Live Life’. 따분함도 받아들여야 할 삶의 일부이고, 삶은 현재진행형이란 명제가 뚜렷해졌다. 언젠가 큰 썰물에 지워져 버린다 해도 가슴 속에 새겨진 글자까지 지울 순 없겠지. 그날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누군가와 동지 의식도 생겼다.
호주 데일리워터스의 “Smile! You are on camera”
호주의 북부 다윈에서 남쪽으로 가던 길이었다. 대화도 웃음기도 싹 가실만한 허허벌판이 이어졌다. 약 600㎞의 국도를 달리다가 탈진 상태에서 마을로 들어섰는데, 궁금증을 유발하는 건물과 표지판이 보인다.
좌측엔 설치미술을 연상케 하는 난해한 주유소가, 우측엔 대낮부터 소음이 새어 나오는 술집(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작 열 명도 살지 않는 마을에 펍이라니? 들어가 보니, 반전 문장의 파라다이스다. ‘술 마시는 동안엔 일하지 말라’ ‘감시카메라 앞에서 웃어라’ 등은 물론 전 세계 유랑자의 푸념 섞인 손글씨가 여행자를 피식피식 웃게 만든다. 사막 한가운데서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는 것만큼이나 쾌청한 유머를 장전했다. 이왕이면 즐겁게, 또 다른 길을 나설 이유가 충분했다.
미국 하와이의 “Only”
북적거리는 오아후섬 중심가에서 노스쇼어(North Shore)로 달리다 보니, 뜬 눈을 다시 한번 동그랗게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파인애플 농장이다. 하늘도, 농장도 포복한 상태로 눈높이에서 그림을 그린다. 추스르지 못할 환희 가운데 레이더망에 잡힌 단어가 있으니 ‘ONLY’다. 유일무이한 풍경이라고? 거기에 서 있는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는 듯했다. 착각이라면 큰 착각이었다. 실상은 버스만 이용 가능한 차선이라는 ‘ONLY BUS’의 일부였다.
여행은 익숙한 일상도 달리 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게 분명하다. 가끔 여행 훈련법을 쓴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상태가 되면, 한국에서도 여행자처럼 세상을 보는 것이다. 한국어를 낯선 언어로 보고, 길가의 야생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오늘을 유일하게 본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Stupid is as stupid does”
아니 발리까지 와서 왜 굳이 체인점을 가야 하냐며 불평하던 참이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모티브로 한 레스토랑 ‘부바 검프 쉬림프(Bubba Gump Shrimp)’였다. 습관대로 실내를 사방으로 훑어보니, 뭔가 훅 치고 들어왔다.
‘바보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지.’ 심히 찔렸다. 후회하고 책망하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무한 질책했던 그 바보가 단단히 들킨 느낌. 귀로 들을 때와 시각적으로 잡아둘 때의 차이는 컸다. 깊은 생각에 빠지다 보면 걱정도 함께 쌓이는 걸 알기에,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바보처럼 한 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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