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루스의 엄마 찾기' 열흘 동행 취재 ①>
36년 만에 나이만 아는 친모 찾아 한국 방문
입양서류상 이름 '신민경' 입양기관이 지어
조산소 있던 방화동에 전단지 붙이며 수소문
"여기서 출산했다면 동네 사람" 증언에 고무
서울로 온 첫날 눈물… 과연 만날 수 있을까
편집자주
친부모를 찾고자 하는 해외 한인 입양인 중 1%만 소원을 이룬다. 출생 과정의 기록을 지우고 입양을 보냈던 잘못된 관행 탓이다. 유전자 정보로 찾는 방법이 있지만 부모가 등록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생후 5개월에 미국으로 입양된 로라 루스 씨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36년 만에 엄마 찾기에 나선 루스씨가 한국에서 보낸 10여 일을 동행 취재했다.
한인 입양인 로라 루스(36)씨는 내내 한국을 잊고 살았다. 1985년 3월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김순감 조산소’에서 태어나 엄마 가슴에 젖이 돌기도 전에 버려졌지만, 생후 5개월이던 그를 입양한 미국인 양부모의 헌신적 사랑 덕에 상처는 덧나지 않았다. 주민 2,000여 명 대부분이 백인인 미네소타주 에이킨의 작은 마을에서 동양인 입양아로 산다는 건 “그리 편치 않은 일”이었지만, 역시 한인 입양인인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어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 박사 학위를 땄고 뉴욕에서 임상물리치료사 자리도 구했다. 쉽게 이룰 수 없는 성취이지만 루스씨는 “운이 좋았다”며 겸손해했다.
순탄한 인생만큼이나 평온한 줄만 알았던 마음에 파문이 인 건 2017년 처음 한국을 찾으면서다.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가 볼까’ 하며 대수롭지 않게 디딘 걸음이었다. 한국 나이로 33세, 이름도 모르는 친모가 자신을 낳은 그 나이가 돼 서울로 돌아온 첫날 밤 루스씨는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엄마, 엄마가 보고 싶었다.
친모를 찾아 한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싣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엄마가 나를 원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꾸 무릎이 꺾였다. '어떤 결말이어도 괜찮아'라며 거듭 다짐한 끝에 지난달 18일 한국에 왔다.
김순감 조산소, 1985년 3월 29일 오전 8시 1분 분만
이달 2일, 경기 용인시에서 14일간 자가격리를 마친 루스씨는 서울 강남구 대한사회복지회부터 찾았다. 입양 서류에 남은 한국 이름 ‘신민경’으로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 중 하나를 품고서다. 하지만 그 이름은 부모가 지은 게 아니었다. 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가 해외 입양을 위해 본관을 ‘한양(漢陽)’, 성을 ‘신(申)’으로 해서 호적을 새로 만들었다. 그 시절 많은 입양아가 이렇게 해서 해외로 보내졌다고 한다.
루스씨 입양 과정에서 제대로 남겨진 기록은 조산원에서 작성한 ‘친권자 불명 확인서’ 정도가 유일하다. 여기엔 33세이던 성명 미상의 여성이 1985년 3월 29일 오전 8시 1분에 루스씨를 낳고 행방불명됐다고 적혀 있다. 기록에 따르면 루스씨 친모는 오전 8시가 거의 다 돼서 배가 아프다며 황급히 조산소를 찾은 뒤 입원 절차를 밟기도 전에 핏덩이를 낳았다. 산모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조산사가 잠시 자리를 비켜 준 사이 친모는 사라졌다. 이름도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였다.
입양 절차가 뒤따랐다. 루스씨를 담당한 사회복지사는 "흰 피부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잘생긴 여아임. 아동을 진정 바라는 가정에 입양 요. 아동의 행복하고 건전한 성장을 바란다"고 입양 서류에 적었다.
사라진 조산원, 원장도 사망… 전단지에 기댄 가족찾기
이튿날인 3일, 루스씨는 자신과 엄마를 이어 주는 유일한 끈인 ‘김순감 조산원’을 찾아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갔다. 하지만 조산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조산원이 있을 땐 대부분 논밭이었던 일대도 이제 주택과 상가가 밀집한 도심이 됐다. 조산원 자리에 새로 들어선 건물에선 카페 주인만이 “이곳에 조산원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확인해줄 뿐이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조산원 원장을 수소문했지만 1914년생인 원장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마저 고인이 됐다. 36년 전 이곳에서 태어난 아기의 사연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란 난망한 상황이다.
그나마 이곳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주민이 “평양에서 온 간호사 출신의 김순감 원장을 기억한다”며 들려준 얘기가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는 “1985년 이곳은 김포공항 근처까지 30분은 걸어가야 버스를 탈 수 있는 외진 곳이었다”며 “여기에 살지 않고서는 만삭의 산모가 조산원에서 애를 낳고 떠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루스씨 친모가 이 동네 사람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이다. 그는 당시 동네에 대해 “시골에서 맨몸으로 상경해 월세를 살며 농사일로 품삯을 벌어 기반을 마련하려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말했다.
힘을 낸 루스씨는 방화동에서 친부모의 흔적을 찾으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과 연락처가 담긴 전단지를 곳곳에 붙였다. 자신을 알아본 혈육들이 연락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전단지를 들고 들렀던 방화1동 주민센터에선 마침 ‘마을 사진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방화1동의 어제, 오늘 사진으로 마음을 담다’라는 주제로, 1980년대 방화동 풍경이 담긴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루스씨는 어린이들이 세발자전거를 타거나 골목을 달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 앞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1990년대 초 교복을 입은 여학생 모습도 한참을 바라봤다. 80년대생인 그가 친부모와 떨어지지 않았다면 저 사진 속 피사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루스씨는 “내 또래 아이들이 이곳에선 어떻게 자랐는지 볼 수 있어 행운”이라며 끝내 눈물을 훔쳤다.
루스씨는 아동권리보장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도움을 받아 건강보험 고지서 뒷면에 싣고 있는 ‘해외입양인 가족 찾기’에도 자신의 사연을 싣기로 했다. 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를 친엄마이지만, 어쩌면 자신을 닮은 루스씨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루스씨는 “4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내 나이가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였다”며 “방화동 골목을 걸으면서, 그동안 두려운 마음에 제쳐 놓고 살았던 의문과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라는 사람이 어디서 왔고 어떤 세계와 연결돼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나의 가족 찾기는 오늘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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