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 도스토옙스키의 임사 체험
1849년 11월 16일, 러시아제국 군사법원은 만 28세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반봉건 사회주의 독서모임에 가담해 "정교회와 최고 권력을 거스르는 불온한 표현들로 가득 찬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하고 유포한 혐의"였다. 1845년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로 평단의 좋은 평가도 받았고, '백야' 같은 후속작으로 쓰린 혹평도 경험한 신인 작가는 12월 22일 오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세메노프스크 광장 형장의 말뚝에 묶이기까지 한 달여간 사형수로 지내며, 길지 않은 생애의 '명성의 꿈'과 '한 더미의 수치'를 압축해 회고해야 했다.
마침내 형 집행일 새벽, 동료 사형수 아홉 명과 함께 쇠창살 마차의 '굴러가는 무덤'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가던 그 짧은 시간 그는 또 한번 저 한 달의 시간을 또 한번 추려 살았고, 세 명씩 짝 지어 말뚝에 묶인 채 눈가리개로 덮이기 전 망막에 새겨진 교회 첨탑 위로 떠오르던 태양과 성스러운 아침 노을의 잔상을, 내면의 눈으로 바라봐야 했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옙스키의 영혼에 자신을 투사해 "죽음에 바쳐진 이 순간이 한 번 더 자기 영혼을 통과하며 모든 잃어 버린 과거를 씻어 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전 일생이 다시 깨어나서 그림이 되어 그의 가슴을 유령처럼 스쳐간다"('광기와 우연의 역사', 안인희 옮김, 휴머니스트)라 썼다. 그 순간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전령이 형장에 달려와 '독서모임' 사형수들의 형 집행을 정지시켰고, 도스토옙스키는 '4년 강제노역형과 사병 추가 복무'로 감형받았다.
한 달여의 모든 극적 과정이 실은 차르가 청년들을 겁주기 위해 꾸민 각본의 드라마였다는 사실은 형장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생살여탈권을 쥔 절대군주의 놀잇감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나중에라도 진실을 알게 됐는지는 불확실하다. 만일 알았다면, 그의 문학이 구현한 죽음과 종교적 구원의 자리에 다른 것이 자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