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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톤 미로 계단 ‘오징어 게임’ 세트장? 48년 된 지중해 아파트

입력
2021.11.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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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완공 스페인 남부 '라 무라야 로하']
'오징어 게임' 계단실과 닮아 전 세계 주목
스페인 건축 거장 리카르도 보필이 설계
"이슬람 성새 '카스바'의 현대적 재탄생"
구조와 색은 비슷... 의도와 의미는 달라
보필 "총 50가구 유기적 연결하는 계단실"
'오징어 게임' 계단실은 감시·통제의 공간
"강렬한 색·빛, 바람·시간 조화...환상 공간"

편집자주

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여행이 있습니다. 세계 건축을 통해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살펴봅니다.

1973년 완공된 스페인 남부의 작은 해안 마을 칼페에 있는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의 계단실(왼쪽 사진)과 올해 넷플릭스 최대 흥행을 기록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계단실(오른쪽). RBTA 홈페이지 캡처·넷플릭스 제공

1973년 완공된 스페인 남부의 작은 해안 마을 칼페에 있는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의 계단실(왼쪽 사진)과 올해 넷플릭스 최대 흥행을 기록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계단실(오른쪽). RBTA 홈페이지 캡처·넷플릭스 제공


스페인 남부 칼페에 위치한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의 내부는 폭 1m가 채 안 되는 좁은 미로 같은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스페인 남부 칼페에 위치한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의 내부는 폭 1m가 채 안 되는 좁은 미로 같은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넷플릭스 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파스텔톤의 미로 계단실은 48년 전 실제 현실에도 등장했다. 1973년 완공된 스페인 남부의 작은 해안 마을 칼페에 있는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La muralla roja·붉은 벽)’의 내부는 드라마 속 계단실과 꼭 닮았다. 미로 같은 구조와 다채로운 색으로 익히 세계적 명소로 떠올랐던 이 아파트는 최근 드라마 흥행에 힘입어 재조명되고 있다. 미국 타블로이드지 뉴욕포스트 등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 흥행 이후 하루 수백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고 있다. 공동주택의 일부는 글로벌 숙박공유업체인 ‘에어비앤비’에 등록돼 있는데 이미 내년 말까지 예약이 다 찼다.

지중해 연안의 스페인 남부 도시 칼페의 절벽 위에 각진 요새처럼 세워진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 RBTA 홈페이지 캡처.

지중해 연안의 스페인 남부 도시 칼페의 절벽 위에 각진 요새처럼 세워진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 RBTA 홈페이지 캡처.


스페인 건축 거장 리카르도 보필은 16세기 이슬람 성새인 '카스바'에서 영감을 얻어 '라 무라야 로하'를 설계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스페인 건축 거장 리카르도 보필은 16세기 이슬람 성새인 '카스바'에서 영감을 얻어 '라 무라야 로하'를 설계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슬람 성새 ‘카스바’에서 영감

지중해 연안의 절벽 위에 있는 아파트는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82)이 이슬람의 건축 양식인 ‘카스바(Kasbah)’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주로 지어진 카스바는 16세기 해적 등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절벽 위에 높은 벽을 쌓아 지은 성새(城塞)다.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해 창은 작게 냈고, 내부는 적이 침입하더라도 방향을 쉽게 가늠할 수 없도록 좁은 미로로 구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가 보필은 북아프리카와 마주한 칼페의 지역적 맥락을 고려해 ‘현대적 카스바’를 떠올렸다. 보필은 종종 “과거 건축 양식을 자세히 연구하면 현대에서도 충분히 활용 가능하면서도 독창적인 건축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성새 '카스바'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의 외벽에는 돌출된 작은 창문이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성새 '카스바'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아파트 '라 무라야 로하'의 외벽에는 돌출된 작은 창문이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지중해 연안 스페인 남부 칼페에 세워진 '라 무라야 로하'는 멀리서 보면 붉은 사각 기둥이 다발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옆에 청록색으로 지어진 주택도 리카르도 보필의 1971년 작품(XANADÚ)이다. RBTA 홈페이지 캡처.

지중해 연안 스페인 남부 칼페에 세워진 '라 무라야 로하'는 멀리서 보면 붉은 사각 기둥이 다발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옆에 청록색으로 지어진 주택도 리카르도 보필의 1971년 작품(XANADÚ)이다. RBTA 홈페이지 캡처.

절벽 위에 들어선 아파트의 외관은 각진 요새처럼 보인다. 돌기둥처럼 길쭉한 사각형 다발이 솟아 있다. 들쭉날쭉한 외벽은 높낮이가 서로 달라 입체적으로 보인다. 아파트 외벽에는 돌출된 작은 창문들이 달려 있다. 지대가 높은 데다 외관도 특이해 인근 지역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총 50가구로 구성된 아파트 내부도 구불구불한 골목으로 연결된 요새의 내부를 닮았다. 내부 중앙에는 지붕조차 덮지 않은 중정이 있다. 네모반듯한 성냥갑에 벽 하나 사이로 가구가 빼곡하게 들어찬 일반의 아파트와 전혀 딴판이다. 이 중정에서 폭 1m가 채 안 되는 좁고 미로 같은 계단과 복도가 시작된다. 방향과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계단실은 ‘오징어 게임’ 속 계단실과 매우 흡사하다.

형태는 비슷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오로지 앞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한 사람씩 일렬로 움직이는 드라마의 계단실과 달리 아파트 계단실은 작은 뜰과 발코니, 창을 통해 수시로 바뀌는 빛과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계단실 등을 통해 5층 높이의 아파트 옥상에 오르면 거주민들의 공용 시설인 일광욕실, 수영장, 사우나 등이 마련돼 있다. 옥상마저 넓은 평면을 쓰는 대신 단차(段差)와 낮은 벽을 활용해 타인의 시선은 피하면서 공간 쓰임새를 높였다.

'라 무라야 로하'의 옥상에는 거주민들을 위한 공용 시설인 수영장이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라 무라야 로하'의 옥상에는 거주민들을 위한 공용 시설인 수영장이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오징어 게임’에는 없는 빛과 바람

애초 설계 의도부터 다르다. 드라마의 계단실은 감시와 통제를 위해 설계됐으나, 보필은 반대로 각 가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계단과 복도를 만들었다. 아파트를 사람의 몸에, 각 가구들은 신체를 이루는 세포에 각각 비유한다. 보필은 “사람의 몸처럼 건축물도 하나하나의 세포로 구성돼 있고, 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라마의 계단실은 획일적인 이동 통로에 불과하지만, 아파트의 계단실은 각 가구로 연결되는 동선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순환한다. 이는 대문을 열고 나오면 앞집 대문과 마주하거나, 각 집 대문이 일렬로 나열돼 있는 한국의 아파트와도 크게 다르다. 이는 가구의 자유로운 출입을 위한 배려다.

드라마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자연 요소와의 결합이다. 한줄기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게 통제된 드라마 속 공간과 달리 아파트는 중정을 통해 들어온 빛과 바람을 각 가구로 전달한다. 외부 공기가 중정으로 들어오면서 남부 유럽의 뜨거운 태양열에 달궈진 아파트의 기온을 자연스럽게 낮추는 효과도 노렸다. 또한 중정을 향해 난 창들은 채광과 환기가 어려운 작은 창문의 한계를 보완한다.


'라 무라야 로하'의 내부 중정을 통해 빛과 바람이 수시로 드나들며 공간을 바꾼다. RBTA 홈페이지 캡처.

'라 무라야 로하'의 내부 중정을 통해 빛과 바람이 수시로 드나들며 공간을 바꾼다. RBTA 홈페이지 캡처.


'라 무라야 로하'의 미로 같은 계단실은 각 가구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동선이 서로 겹치지 않게 해준다. RBTA 홈페이지 캡처

'라 무라야 로하'의 미로 같은 계단실은 각 가구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동선이 서로 겹치지 않게 해준다. RBTA 홈페이지 캡처


'라 무라야 로하'의 계단실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공간과 달리 하늘이 뻥 뚫려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라 무라야 로하'의 계단실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공간과 달리 하늘이 뻥 뚫려 있다. RBTA 홈페이지 캡처.

‘오징어 게임’ 계단실과의 공통점으로 꼽히는 다양한 색도 아파트의 핵심 특징이다. 아파트 이름과 같은 붉은색부터 분홍색, 갈색, 보라색, 파란색, 하늘색 등이 쓰였다. 보필은 다채로운 색을 쓴 이유에 대해 “외부의 붉은색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토양의 색과 최대한 닮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푸른 바다와 보색 효과를 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내부의 색은 방향이나 위치에 따라 공간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됐다. 반면 ‘오징어 게임’에서 파스텔톤의 다양한 색은 억압과 공포의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됐다.

같은 색이라고 다 같지 않다. 생명력 없는 인위적 공간을 탄생시킨 드라마의 색과 달리, ‘라 무라야 로하’의 색은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생기 넘치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보필은 “강렬한 색과 빛, 바람, 시간의 조화를 통해 환상적인 공간이 완성됐다”고 했다.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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