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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대한 한국문학의 첨예한 연구

입력
2021.11.15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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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편집자주

※ 한국 문학의 가장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4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정지돈 소설가.

정지돈 소설가.


정지돈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는 재미 한인사회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고 북한 정권 수립에도 참여했지만 이후 김일성이 주도한 종파투쟁 과정에서 숙청되었던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정웰링턴은 이 소설에서 확고한 서사적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생애는 선우학원과 김강, 전경준을 비롯한 한인 공산주의자들과의 관련 속에서 파편적이고 사변적으로 재구성된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역사에서 자신들이 살아냈던 삶의 시간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소환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소환자의 관심이 ‘날씨’(개별 인간의 내면)가 아니라 ‘기후’(인간 일반이 구성하는 시스템)에 있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근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운동양식의 하나인 혁명을 ‘기후’의 관점에서 관측하기 위해 도입된 데이터들의 성좌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그런데 왜 혁명일까. 혁명은 인류가 고안했던 가장 강력한 전망의 형식이었지만 결국 그 필연성의 쟁취에 실패하고 거대한 무의미의 늪에 인류를 빠뜨린 전대미문의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혁명은 필연과 우연, 믿음과 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수행과 정지가 이항 대립하는 패턴의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이와 같은 정지돈 특유의 이항대립은 정웰링턴의 마지막 날들에도 기입된다. 이렇게 계속 존재할 것인가 스스로 그칠 것인가. 정웰링턴은 냉전 시대의 ‘햄릿’과 같다.

정지돈은 이항대립을 즐겨 사용하지만 양자택일이나 동어반복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는 데 성공한다. 이 작품에서 정지돈은 실패와 불능을 온몸으로 살아냈던 불우한 한 인물을 통해 회의주의적 사변의 견결함을 이끌어낸다. 이 회의주의가 견결한 이유는 ‘내적 망명’이 아니라 ‘병행 정치’의 가능성과 접합하기 때문이다.

‘내적 망명’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폐소성과 연관된다면 ‘병행 정치’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타인과 교차하고 연결되는 순간을 간직한다. 정지돈은 ‘공유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는’ 정웰링턴이라는 인물을 내적 망명자가 아니라 현재를 어그러뜨리는 유령처럼 우리 앞에 교차시킴으로써 혁명의 의미를 사유하는 탄성의 순간을 생성해낸다. 이것은 혁명에 대해 오늘날 한국 문학이 수행한 첨예한 한 연구이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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