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단 하나의 아이'(문장웹진 9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새 유독 한 SNS 광고가 타임라인에 자주 등장한다. 돌봄과 배움이 함께 필요한 4세부터 13세 아이에게 대학생·전문 선생님을 매칭해주는 ‘자란다’라는 이름의 서비스다. 광고 영상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선생님의 품에 안기고, 선생님들은 카메라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해주는 게 감개무량해요.”
광고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남의 아이들’과 만나기 힘들어졌을까?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식당에서, 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사라졌다. 범죄가 두려워 아이를 꽁꽁 숨겨야 하기도 했겠지만, ‘노키즈존’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일상에서 지워온 어른들이 만든 풍경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 그 손해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막대하다. 어린이만 어른을 보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 역시 어린이를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문장웹진 9월호에 실린 정이현 작가의 소설 ‘단 하나의 아이’는 그렇기에 더 많은 어른들이 어린이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나’도 원래는 “어린이라는 대상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당신도 한때는 아이였다거나 모든 어른의 내면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웅크리고 있다거나 하는 문장을 들으면 바나나 껍질을 삼키다 만 것 같은 기분이 될" 정도다. 노키즈존 문제도 그저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이라면 그게 누구든 얼마나 어리든 얼마나 늙었든 자신이 앉아 있는 곳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한나가 놀이 가정교사 연결 업체에 지원서를 넣은 건 단지 원래 일하던 레스토랑보다 시급이 1.5배 높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한나씨의 어떤 면을 좋아할까요?”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한나는 이렇게 답한다.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곁을 변함없이 지키고 힘이 되어 줄” 거라고.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급하게 지어낸 이 말이 진심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초등학교 3학년 여아인 하유와 시간을 보내며, 한나는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씩 배워간다. 초등학교 3학년은 “부정확하고 미숙하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낼 줄 아는 나이라는 것도. 그걸 깨닫기 위해 한나가 한 일은 그저 아이의 곁에 앉아, 시간을 들여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하유가 처음으로 자신을 쌤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 접촉을 금지하는 케이 파라디소의 조항이 아니었다면 하유를 안아 주었을까? 많이 무서웠겠지만 이젠 아침이 되었다고, 너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 내가 왔다고,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 법이라고 아이의 연약한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을까?”
어린이는 낯선 존재다. 어린이는 시끄러울 수 있고, 어린이는 미숙할 수 있고, 어린이는 불편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라도 어른들은 더 많은 어린이와 만나야 한다. 낯선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른다운 어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22일부터 모든 초·중·고등학교의 전면 등교가 실시된다. 오랫동안 고립되었을 어린이들이 부디 적대 없는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맘껏 뽐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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