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저변 자영업, 175만 명 과잉
"음식점총량제 권리금 높여 생태계 붕괴"
사업형·생계형 맞춤지원 상권정보 필요
편집자주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박일근 논설위원이 살아 숨쉬는 우리 경제의 산업 현장과 부동산 시장을 직접 찾아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코로나19 전 매출이 100이라면 지금은 30정도밖에 안 돼요. 식당 문을 닫는 곳은 많지만 창업하겠다는 사람은 없어 더 이상 물건을 쌓아둘 곳도 없습니다.”
11일 서울 황학동 주방가구거리에서 만난 중고식기전문점 ‘그릇사랑’의 유승교 부장은 상황이 좀 나아졌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으로 경기가 다소 풀릴 것이란 기대도 있지만 아직 현장 분위기는 냉골이라는 것. 실제로 가게 안팎엔 폐업 음식점 등에서 가져 온 쟁반과 불판, 접시 등 중고 그릇들이 통로까지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는 “이젠 폐업 식당에서 그릇을 가져가달라고 부탁해도 창고가 꽉 차 처리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12일 서울 대학로 혜화역에서 성대로 가는 길에 자리 잡은 에코코인노래방. 예전 같으면 대기 손님들이 줄을 서는 ‘불금’이지만 분위기는 썰렁했다. 코인노래방은 헬스장 등 실내체육시설과 함께 백신 패스 적용 업종이라 접종완료 증명이나 코로나19 음성 확인 없인 손님을 받을 수 없다. 실제로 입구에선 백신 패스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학생들도 보였다. 경기석 한국코인노래연습장협회장은 “청소년 백신 접종률이 5%도 안 되는데 청소년이 자주 찾는 코인노래방에 백신 패스를 적용한 건 사실상 망하라는 얘기여서 초상집이나 마찬가지”라며 “술도 팔지 않고 수도권에선 연쇄(n차) 감염이 된 경우도 없는데 규제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극단 선택 자영업자 994명
벼랑 끝에 몰린 700만 명 자영업자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달 들어 위드 코로나에 장사를 재개한 곳이 늘었지만 매상은 아직 기대에 못 미쳐 한숨은 그대로다. 정부의 손실보상이 시작됐지만 그동안 세금 신고를 소홀히 한 경우엔 보상액이 수십만 원에 불과, 적자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아르바이트생을 자르고 제2금융권에서 빚도 내 버텨보지만 하루하루가 힘들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개인 사업자 444만 명의 대출 잔액은 988조5,000억 원(8월 말 기준)이나 된다. 지난해 폐업 음식점은 5만4,437개(한국외식산업연구원)에 달했다. “이젠 좀 쉬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등지는 자영업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이어지고 있다. 경찰청은 지난해 극단적 선택을 한 자영업자가 944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했다. 개미지옥이 된 자영업 공화국의 해법은 없을까. 여야 대선 후보들이 ‘음식점 총량제’와 ‘50조 원 손실보상’안을 내놨지만 자영업자들은 오히려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하지 못한 자영업자들이 무인점포로 전환하며 사회 전체의 일자리도 줄고 있다. 자영업 단체와 전문가들을 만나 자영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봤다.
한국 자영업자의 가장 큰 문제는 너무 많다는 데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비임금 근로자는 662만 명이다. 직원을 둔 자영업자(131만 명)와 직원 없는 나홀로 자영업자(425만 명), 그리고 무급 가족 종사자(106만 명)를 모두 합한 수치다. 특히 직원을 둔 자영업자는 1년 새 6만 명 넘게 감소했다. 반면 나홀로 사장은 늘었다. 장사가 안 되자 직원을 해고하고 혼자 모든 일을 하는 허울뿐인 사장님이 많다는 얘기다.
전체 취업자(2,774만 명) 대비 비중은 24%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10%포인트나 많은 것으로, 일본과 독일의 2배, 미국의 4배에 달한다. KDI는 국내 자영업자의 적정 규모를 388만 명(무급 가족 종사자 제외)으로 분석했다. 결국 자영업자 중 무려 175만 명은 과잉이란 이야기다.
적정 자영업자 175만 명 초과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자영업자가 많아진 건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으며 대기업 등에서 쫓겨난 이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고용해 자영업자가 된 영향이 크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경제 위기를 겪을 때마다 고용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이들을 주워 담은 곳이 사실 자영업”이라며 “모든 정부가 혁신 성장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양극화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커지며 그 아래 자영업자 상황이 더 열악해진 측면도 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란 얘기다. 다만 최근 통계청의 자영업자 사업 동기 조사에선 ‘자신만의 사업을 직접 경영하고 싶어서’(69.8%)가 ‘임금 근로자로 취업이 어려워서’(22.2%)라는 답변보다 더 많아 질적인 변화도 포착된다.
이처럼 자영업이 포화 상태가 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각에선 진입 장벽을 높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꺼내 든 음식점 총량제도 그중 하나다. 이 후보는 지난달 서울 신원시장에서 열린 소상공인·자영업자 간담회에서 “마구 식당을 열어 망하는 건 자유가 아니다”며 “음식점 허가 총량제를 운영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고 밝혔다. 곧바로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란 비판과 논란이 일자 다음 날 “당장 시행한다는 건 아니다”고 물러섰지만 “불나방들이 촛불에 타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여지를 남겼다.
인위적 구조조정 위험, 피해 조사부터
그러나 정작 자영업자들도 총량제에 대해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김기홍 '코로나19 대응 전국 자영업자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자영업은 창업과 폐업이 자유로워 치킨집을 하다 망하면 다른 업종으로 재창업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강점인 시장”이라며 “총량제를 하면 권리금이 높아져 한번 망하면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자영업 생태계가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총량제가 도입되면 오히려 더 큰 자본이 들어와 영세한 이들은 접근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자영업자가 너무 많으니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으로 대안이 없는 한 함부로 거론해선 안 된다는 게 학계 지적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용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 다만 일부 자영업자들은 이번 논란을 정치적 공방으로만 흘려 보낼 게 아니라 사회적 논의를 진전시키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내놨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50조 원 전액 손실보상’에 대해서도 회의적 반응이 많았다. 이성원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사무총장은 “면밀한 계산이나 검토 없이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며 “전액 손실보상을 한다면 사실 50조 원으로도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이 사무총장은 “정부의 집합금지와 영업시간 제한으로 장사를 못한 가게에 납품하던 거래업체의 피해도 큰 데 이런 2, 3차 피해와 사각지대까지 포함해 보상하겠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김 대표도 “50조 원, 100조 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먼저 피해액이 얼마인지 제대로 된 조사를 진행하는 게 급선무”라며 “이를 근거로 정확한 보상이 이뤄져야 하는데 단기 대책만 내놓고 장기적인 시스템과 해결책은 없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감당 못해 무인점포 급증
사실 최근 자영업자들이 가장 원하는 건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 달라는 것이다. 김 대표는 “대기업과 5인 미만 영세 자영업에 똑같은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건 무리”라며 “자영업자들도 최저임금을 다 주고 싶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 결국 사업을 접거나 고용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저임금 부담에 무인점포가 늘고 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김 대표는 “과거엔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지만 지금은 4차 산업혁명으로 무인 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어렵지 않다”며 “결국 사회 전체로 볼 때 노동의 기회마저 사라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최근 무인점포는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3,600여 개였던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점은 올해 4,000개를 넘었다. GS25와 CU, 이마트24, 세븐일레븐 등의 무인편의점도 이미 1,000개를 돌파했다. 물론 절도 등 무인점포 관련 범죄도 증가하고 있지만 정부는 스마트상점이 지난해 6,450개에서 올해 2만3,000개, 2025년에는 10만개(목표)까지 늘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9월 자영업자 195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선 응답자의 67%가 무인 점포를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최저임금 부담이 가장 큰 이유였다.
지역화폐 활성화로 골목 상권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역화폐·골목상권살리기운동본부는 내년 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이 77%나 삭감된 데 반발, 지난 2일부터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호준 한국편의점네트워크 사무총장은 “지역화폐는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자영업자들에게 숨통을 터줬다”며 “예산을 줄일 게 아니라 더 늘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재명 후보도 15일 농성장을 찾아 지역화폐 예산 삭감을 홍남기 부총리의 ‘만행’으로 비판한 뒤 “따뜻한 안방이 아니라 찬바람 부는 엄혹한 서민 삶도 체험해 보시라”고 각을 세웠다.
전문가들은 자영업자를 하나로 볼 게 아니라 사업형과 생계형으로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정희 교수는 “자기 자본으로 창업한 뒤 사업을 더 키우려는 자영업자들은 산업진흥의 관점에서 지원, 점포와 규모를 계속 늘려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마땅한 일이 없어 생계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가게를 꾸려가는 영세 자영업자들은 복지 차원에서 보호 정책을 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용보험 확대, 데이터 구축 시급
이진국 KDI 연구위원은 자영업의 진입과 퇴출 양쪽에서 정부가 할 일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영업자 중엔 가게를 접고 나오고 싶어도 철거와 원상복구 비용조차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경우와 임대차나 가맹 계약 등에 묶여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며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듯 정부가 자영업자들이 폐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영업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폐업하려면 먼저 고용보험을 확대하는 게 전제돼야 한다. 이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자영업자들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1% 정도밖에 안 되고 이 때문에 당장 먹고 살 게 없으니 폐업도 못 하는 것”이라며 “임금 근로자의 고용보험료를 근로자가 절반 내면 나머지는 직장에서 내는 것처럼 자영업자 고용보험료도 절반은 국가가 부담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충분한 상권 분석 정보 등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 자영업자에 대한 정부 지원은 자금을 빌려주는 금융 지원에 집중돼 있는데 창업 준비와 컨설팅 등 비금융 지원도 중요하다”며 “도소매와 음식숙박 등 과밀도가 심한 업종은 가이드라인을 통해 진입 자제를 유도하는 한편 시장 현황과 상권 분석, 예상 수익 등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제공해 신중한 창업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프랜차이즈 다점포율을 의무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는 전체 가맹점 중 점주 1명이 2개 이상의 점포를 거느린 비중을 말하는데, 종합적으로 가맹점주의 만족도와 높은 사업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 자영업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데이터를 통합 구축하는 작업도 시급하다. 이 연구위원은 “자영업자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기업으로, 사람의 고민과 기업의 문제가 첨예하게 얽혀 있고 우리 경제의 저변을 지탱하는 경제 사회적 안전망 역할도 하고 있다”며 “각 부처에 나뉘어진 자영업 정책을 한곳으로 모아 통합 관리할 컨트롤타워를 세우고 자영업에 대한 기초 데이터부터 쌓아가야 제대로 된 진단과 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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