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경상북도 고령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해남에 다녀왔다. 국내 최초의 여관이었다는 대흥사 옆 유선관에서 두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세 개의 절과 하나의 석탑을 수학여행하듯 훌훌 돌아보았다. 일일생활권이다, 사통팔달이다 해도 우리나라에는 못 가본 고장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휴대폰을 켰다. 여행 내내 부러 전원을 꺼둔 터였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 휴가 계획을 들은 친구들이 “해남은 말이야…” 하고 너도나도 훈수를 놓는 통에 실은 몹시 피곤했다. 해남에 가면 반드시 어디 식당 닭구이를 먹어봐야 한다는 둥, 진짜 단풍 명소는 해남 대흥사가 아니라 강진 무위사라는 둥 묻지도 않았는데 오지랖 부리는 녀석들 때문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이처럼 전국 팔도 안 가본 곳이 없다며 자랑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백신처럼 꺼내 드는 동네가 바로 고령이다. 충청남도 보령 말고 경상북도 고령. 고등학교가 두 개, 99개석을 갖춘 영화관이 하나. 시장은 5일에 한 번 서고 기차는 아직 다니지 않는다. 시골의 고립무원을 원하는 여행자에게는 그야말로 청정구역 같은 곳.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하이고마, 먼 길 오셨지예” 하며 밭에서 딴 앵두며 블루베리를 한 움큼씩 쥐여 주는 곳이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던 2019년 여름, 나는 끝도 없이 펼쳐진 수백 기의 무덤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한 여행 잡지의 의뢰로 고령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취재하러 간 터였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역을 여행지로써 널리 알리는 것이 취재의 목적이었지만 막상 가보니 사람들이 잘 모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듯했다. 공기도 맑고 음식도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지만 그뿐, 같은 경북 지역인 안동이나 경주에 비하면 볼거리도 먹거리도 그냥 그랬다. 게다가 때는 7월의 한복판. 조금만 걸어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날씨였다. 내가 끓는 물에 담갔다 뺀 요구르트 병 같은 몰골로 여기서 제일 유명한 게 뭐냐고 묻자, 군청 직원들이 해맑은 얼굴로 합창하듯 대답했다. “고분 아입니꺼!”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준 관광 안내 책자를 펼치니 ‘철의 왕국 대가야!’라는 호탕한 제목 아래 고대의 무덤이라는 고분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무덤이 관광 명소인 고장이라니, 이래선 곤란하다 싶었다. 게다가 그 고분은 그냥 무덤도 아닌 대가야 시대 왕과 귀족들이 묻힌 무덤이었다. 살아생전 높은 분을 모시던 사람들이 그를 따라 산 채로 묻힌 장소라는 뜻이다.
고분 취재에 앞서 읍내 인근에 있는 대가야박물관에서 당시 순장자들의 자취를 관람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발굴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는 왕릉의 좁고 네모난 석곽들에는 무덤 주인을 가까이 모신 첩과 시녀, 무사, 노비 등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복제품이 저마다 한 무더기씩 들어있었다. 눈치 빠른 군청 직원이 “쪼매 그르치예?” 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난감했다. 천년 묵은 무덤에 사람 뼛조각이라니, 일부러 휴가를 내어 찾고 싶은 볼거리는 확실히 아니다.
박물관 투어를 마친 우리 일행은 군청에서 연결해준 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고령의 자랑이라는 ‘지산동 고분군’으로 황황히 발을 옮겼다. 해발 310m 주산(主山)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낙타 혹 같은 봉분들이 울룩불룩 늘어서 있었다. 모두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조성된 무덤이라고 했다. 가까이서 본 고분은 의외로 규모가 상당했다. 사진가는 일행을 고분 앞에 번갈아 세우며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비교 대상인 사람이 옆에 있어야 고분의 우람한 자태가 더 실감 나게 담긴다는 거였다.
“내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는데 아직도 못 본 고분이 많심니더. 초여름 고분 다르고, 늦가을 고분 다르지예.” 해설사가 산 중턱에 포도송이처럼 퍼져 있는 왕들의 무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언덕 위에서 자신의 저택을 굽어보는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 같아서 호기심이 일었다. 고대에 조성된 무덤 수백 기가 동네 전체를 무덤덤하게 에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묘하기는 했다. 그 옛날 무슨 수로 산등성에 무덤을 올렸을까? 돌은 어떻게 옮겼으며 흙은 대체 어디서 가져왔을까?
설상가상, 무덤 주인들은 이름조차 알 길이 없다. 지금껏 이름이 밝혀진 왕은 47호분의 금림왕이 유일하다. 봉분들은 크기만 다를 뿐 생김새도 그다지 특징이 없다. 그러니 서로를 구분하는 일 또한 별 소용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확실히 사람을 홀리는 뭔가가 있다. 수백 기의 무덤이 500년 넘게 번영한 고대 국가의 실존을 조용히 웅변하는 느낌. 그 소리 없는 외침에는 평지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어떤 박력이 서려 있다. 아무튼 아무 데서나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내려오는 길에 자세히 보니 길 곳곳에 화투장만 한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개중에는 가야 토기의 상징인 물결무늬가 또렷이 남아있는 것도 있었다. 이거 보물 아니냐며 수선 떠는 우리를 지켜보던 해설사가 “우리 으릴 때는 이걸로 비석치기하믄서 놀고 그랬십니더”라며 바닥에 있는 토기 조각을 발로 툭 찼다. 이 동네에선 발에 채는 게 토기 조각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동작이었다. 이때만 해도 괜한 허풍쯤으로 치부했는데, 터미널에서 잠시 만난 촌로 역시 “지가 국민핵교 댕길 때는 슨생님이 방학 숙제로 유물 찾아오라 하고 그랬지예”라며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6가야 중 하나인 대가야의 도읍지였다는 사실은 역사 도시 고령의 은근한 자부심인 듯했다.
고령에서 만난 취재원들도 범상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30년 된 오동나무를 깎아 가야금을 만드는 명인은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했다. 읍내 장터에서 3대째 쇠를 담그고 있다는 대장장이, 허리춤에 화살통을 차고 터프하게 벌판을 달리는 기마무사(!)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니 현실 감각이 점차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내가 모르는 동네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기운이 났다.
그러나 사람은 역사만 먹고 살 수 없고, 어느 동네에나 빛과 그림자는 있는 법. 인구 3만2,000여 명의 고령은 경북 지역의 여느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소멸 위기를 겪고 있다. 실제로 고령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낀 첫인상은 ‘여백’이었다. 뭐랄까. 땅은 넓고, 사람은 없고, 한마디로 여백이 너무 많았다. 내가 아는 한 작가는 “풍경에 여백이 많아야 사색할 여유가 생긴다”고 했는데 이 정도 여백이면 하루 이틀만 머물러도 아주 사색의 달인이 될 듯했다.
취재 중에 만난 20대 청년들 역시 근처 대구에 본가를 둔 경우가 많았다. 37년간 공무원으로 살다 고령에서 인생 2회차를 시작했다는 60대 농부는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블루베리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귀농인의 영농정착을 위해 애쓰는 모양이었다. 농부는 동네 이름이 고령이라 그런지 고령자만 남았다며 웃었지만 서울에서 온 우리는 그 말에 마냥 따라 웃기 어려웠다.
취재를 마치고 한동안 고령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멜론은 백색인 ‘설향’이 최고라는 둥, 고려청자의 원류는 가야 토기라는 둥 떠들 때마다 친구들은 “얘 또 고령 타령이니?” 혀를 찼다(앞서 해남 여행에 훈수를 둔 그 친구들이다). 고작 일주일 남짓한 여정이었지만 고령은 이상하게 여운이 길었고, 가끔 포털 사이트에서 관련 뉴스를 접할 때면 길을 걷다 깨진 토기 조각이라도 발견한 듯 반가웠다. ‘고분에서 구지가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새겨진 말방울이 출토되었다’는 식의 지역 신문에나 실릴 법한 사소한 뉴스가 대부분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고령 사람들은 그것을 사소하게 넘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게다가 말방울 출토는 알고 보니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뉴스였다).
지금도 나는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의 안부를 궁금해하듯 이따금 고령을 떠올린다. 그러잖아도 사람이 없는 동네가 점점 유령 도시처럼 변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가끔 주변 사람들이 갈 만한 여행지를 물으면 “고령이라는 곳이 있는데…” 하며 알고 보면 진국인 친구를 소개하듯 조심스레 운을 떼기도 한다. 한 동네를 만난다는 건 가끔 안부를 물어야 할 친구가 한 명 생긴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고분을 상상하며 혼자 즐거워하기. 이를테면 초겨울 아침의 고분. 희붐한 새벽안개가 꼬리를 끌며 고분과 고분 사이를 떠돈다.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이름 모를 꽃들이 몸을 흔든다. 무덤은 괴괴하지만, 풍경은 그저 아름다워서 나는 넋을 빼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역시, 세상에 그냥 동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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