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첫 칼럼을 ‘와인의 기원’에 관해 썼다. 글 말미에 우리나라에서 상업용으로 만든 최초의 와인을 언급했다. 1974년 해태주조에서 만든 ‘노블와인 3종(노블로제, 노블클래식, 노블스페셜)’으로 “국회의사당 앞에 해태상을 세우면서 기념으로 노블와인 백포도주 72병을 양쪽에 36병씩 타임캡슐처럼 묻었으며 100년 후에 개봉하기로 했다”고 말이다.
칼럼이 나간 이튿날, 당시 광명동굴 와인 연구소 최정욱(현 최정욱 와인연구소) 소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유럽 ‘와인’과 ‘한국 와인’의 정의가 다르다.
유럽연합에서는 1907년 9월 프랑스가 발표한 와인 정의를 공유한다. 이들이 말하는 와인이란 “신선한 포도나 포도즙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한국 와인은 프랑스의 와인 정의보다 개념 폭이 넓다. “한국 와인은 한국 땅에서 재배한 과실을 파쇄 및 발효한 술이다.” 즉, 우리 땅에서 재배한 포도, 사과, 감, 딸기, 다래, 머루, 복숭아, 살구 등 과일을 잘게 부숴 발효한 술이 한국 와인이다.
같은 과실이라도 복분자주, 오디주, 매실주 등은 한국 와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주세법상으로는 와인이든 아니든 이 모두를 ‘과실주’라고 칭한다. 하지만 ‘와인’과 ‘○○주’는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와인은 과일 자체를 ‘발효’해 만든다. 반면 ○○주는 발효와 증류 과정을 이미 거친 주정 또는 증류주에 과일을 ‘우려’내거나 과일즙을 ‘섞어’ 만든다. 이렇게 빚은 술을 ‘혼성주’라고 한다. 그러니 필자 또래의 추억 속 ‘○○포도주’는 포도주라는 명칭이 붙긴 했지만 와인이 아니다.
고려, 한반도에 소개된 와인의 역사
말이 나온 김에 한국 와인의 역사를 톺아보자.
한반도에 와인이 소개된 시기는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가 보낸 와인을 마셨다는 기록이 최초다.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의 사위로, 원 세조는 고려 왕실에 와인을 몇 차례 보냈다.
조선 인조 때 기록도 있다. 호조판서 김세렴이 쓴 ‘해사록’에 따르면, 그는 인조 14년(1636년)에 대일통신부사로 간 대마도에서 대마도주와 레드와인을 마셨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멜표류기’에도 와인이 나온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이 1653년 나가사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다. 이들은 제주 관원들에게 잘 봐달라며 은잔과 쌍안경을 건네면서 스페인산 레드와인을 바쳤다고 한다.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조선 관원들은 포도주 맛을 보더니 매우 흡족해했다. 포도주를 연거푸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 하멜 일행을 우호적으로 대했단다.
이뿐만이 아니다. 18세기 초에는 일암 이기지가 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와 ‘일암연기’를 썼다. 그는 아버지 이이명이 숙종의 부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로 가게 되자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그곳에서 가톨릭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와인을 여러 차례 접할 수 있었다.
손관승 작가가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기지는 일종의 와인 시음기를 남겼다. “포도주색이 검붉고 맛은 매우 방렬(芳烈)하여 상쾌하다.” “입에 들어갈 때는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다. 선인(仙人)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색, 향, 맛뿐만 아니라 향미의 강도와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까지 잘 표현한 18세기 조선인의 시음기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독일인 오페르트가 남긴 기록도 있다. 그는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샴페인 등 와인뿐만 아니라 브랜디, 위스키 등 양주를 조선에 가져왔다. 그는 ‘금단의 나라 조선’에 이렇게 썼다. “조선인은 샴페인과 체리 브랜디를 선호하며 그 외에도 백포도주와 브랜디 여러 종류의 독주를 좋아한다. 반면 적포도주는 떫은맛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
그 뒤 문호가 개방되고부터는 한반도에 와인이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당시 한자로 표기한 명칭을 보면 묘한 재미가 있다.
식량 부족한데... 와인이 국내에서 만들어진 배경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에서 포도가 본격적으로 재배된 때는 1906년 뚝섬 원예모범장과 1908년 수원 권업모범장이 생긴 뒤다. 주로 미국종 포도를 심었다. 1910년에는 프랑스에서 유럽종 포도 1,800주를 들여와 시험 재배했다. 1918년에는 경북 포항에 미츠와 농장이 만들어져 ‘아카다마’ 포도주를 빚을 포도를 재배했다. 모두 일제하에서의 일이다.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상업용 와인은 1969년 ㈜파라다이스에서 생산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다. 포도로 만든 와인은 1974년 선보인 노블와인이 처음이다. 이전에도 포도로 만든 와인이 있었지만 우리 기술이 아니었다. 1968년 일본 산토리와 농어촌개발공사(농수산물유통공사의 전신)가 합자해 대전에 ㈜한국산토리를 세웠다. 이곳에서 1969년 산토리의 기술로 선리 포트와인을 생산했으나, 한국산토리는 경영난에 처해 해태주조에 매각됐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부터 와인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당시 한국은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곡물을 대신할 술 원료를 찾도록 지시했다. 바로 과일, 그중에서도 포도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파라다이스, 해태주조, 동양맥주 등 여러 기업이 와인 산업에 뛰어들었다. 곧 지역에 대규모 포도원과 과수원을 조성해 와인을 생산했다. 앞서 언급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를 시작으로 노블와인이 출시됐다. 1977년에는 동양맥주에서 ‘마주앙’(이후 롯데주류가 인수)을, 1981년에는 진로에서 ‘샤토 몽블르’를 생산했다. 뒤이어 파라다이스에서 ‘올림피아’(이후 수석농산이 인수하여 1986년 ‘위하여’로 변경)를, 대선주조에서는 ‘그랑주아’와 ‘앙코르’를, 금복주에서는 ‘두리랑’과 ‘엘레지앙’을 선보였다.
바야흐로 ‘국산 와인’의 전성기였다. 당시 와인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인기를 누려 매해 10~30% 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1987년 수입자유화 조치가 시행되자 국산 와인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무릇 인생사에 파도는 늘 있는 법, 와인 산업에도 다시 볕이 들었다. 이대형 박사(전통주 연구자)에 따르면, “1993년 지역특산주(농민주) 면허가 생기면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로 술을 만들 수 있었으며, 2004년 한·칠레 FTA가 체결되자 포도 농가에서 타개책으로 가공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와인”이었다.
그때부터 농가형 와이너리가 속속 생겨났다. 지금은 전국 200여 개의 와이너리에서 800여 종의 와인을 생산한다. 옅은 숨이 끊길세라 명맥을 잇기에도 벅찼던 시절을 생각하면,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1970년대엔 기업, 2000년대엔 농가가 제작 주도
우리나라 와인의 품질은 어떨까.
초기에는 생산자들의 의욕에 비해 품질은 기대 이하였다. 경험이 부족할뿐더러 품종에 따른 포도 재배법과 양조술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허투루 흐르지 않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은 생산자들 덕분에 와인 양조 20년의 역사만큼 한국 와인이 숙성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테루아르(토양과 기후 등 포도밭을 둘러싼 자연환경)에 맞는 품종을 개발했음은 물론 앞선 나라의 성공 사례를 배워 우리 품종에 맞는 포도 재배법과 양조술을 익혔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한국 와인’의 정의 또한 정립했다.
1970~80년대에는 기업이 주도해 와인 산업을 이끌었다면, 2000년대 이후로는 농가형 와이너리에서 주로 와인을 생산한다. 기업에 비해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여러 와이너리에서 다양한 원료로 만든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한국 와인이 발전한 데에는 생산자는 물론이고 기관과 학교, 소믈리에와 레스토랑의 협력도 있었다. 그 결과 국내외 권위 있는 여러 와인 품평회에서 한국 와인이 수상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갈수록 자사의 와인리스트에 한국 와인을 올리는 특급호텔과 미슐랭스타 레스토랑이 느는 추세다. 또 국가 행사에 사용할 축하주나 건배주로도 채택되고 있다.
봄꽃이 핀 들녘의 향긋한 향
얼마 전 필자는 한국와인생산협회 인증점수제(K-Wine Point)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가을 날씨치고는 몸서리쳐지는 추운 날씨를 뚫고 심사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심사장은 마치 봄꽃이 핀 들녘처럼 향긋한 향이 가득했다. 여러 과실로 빚은 한국 와인 덕분이었다. 포도, 사과, 감, 딸기, 오미자, 다래, 머루, 자두, 복숭아, 살구... 우리 땅에서 우리 과일로 빚은 와인이 이 땅의 선남선녀만큼이나 다양할뿐더러 매력적이었다.
출품된 한국 와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과일로 빚은 까닭인지 그 향과 맛이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화이트, 로제, 레드, 스파클링, 스위트와인은 물론 주정강화와인과 브랜디까지 스타일도 다양했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의 본보기를 보는 듯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강원도에서 왔다는 와인 메이커 부부와 오랜 시간 와인 이야기를 나눴다. 샴페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든 오미자 스파클링와인, 청수와 청향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 거봉으로 만든 로제와인, 캠벨얼리와 머스캣베일리에이(MBA) 품종으로 만든 레드와인, 산머루 세미스위트와인, 복숭아 와인, 자두 와인, 청수와 샤인머스캣을 블렌딩한 아이스와인, 사과 브랜디… 품종과 과종을 넘어 이야기하는 동안 생산자들의 삶으로 블렌딩되어 깊게 익어가는 한국 와인을 비우는 행복을 누렸다. 이미 한국 화이트와인은 수준급이었다.
자리를 파할 무렵 협회에서 챙겨준 사과 한 봉지를 들고 길을 나섰다. 달빛 환한 인사동길을 걸으며 사과 하나를 꺼내, 와인을 150종이나 시음하느라 까매진 입으로 베어 물었다. 아까 시음했던 사과 와인 향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살던 청산, 추억과 미래가 만나는 그 땅을 향한 그리움이었을까. 사람이든 와인이든 나고 자란 테루아르가 왜 중요한지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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