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29일
12월 15일 대선 하루 전 김현희 국내로 압송
진술 외 물증 없어…유족들 34년 간 진상 규명 요구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KE858 위치 보고 로저. 현 위치 북위 14도45분 동경 95도38분 어디스(URDIS) 통과."
"KE858 위치 수신. 다음 교신 지점 북위13도57분 동경97도51분 타보이(TAVOY) 방콕관제소와 교신 바람. 굿바이 로저."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1분,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가 미얀마 벵골만 상공에서 랑군 항공통제소와 마지막 교신을 한 뒤 사라졌다. 태국 정부는 칸차나부리 사이욕 부근에서 KAL기로 추정되는 비행물체가 폭음을 내며 추락했다는 주민들의 신고가 있었다고 발표한다.
당시 사고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해외근로자 88명과 주이라크 총영사 부부 2명, 내국인 개인 탑승자 3명, 외국인 승객 2명, 그리고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대한항공 측은 폭발로 전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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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와 비행기 잔해 수색은 진척이 없었지만 수사는 빨랐다.
사건 발생 이틀 만인 12월 1일 바레인 경찰이 일본인 신분으로 위장한 하치야 신이치(김승일)와 하치야 마유미(김현희)를 검거한다. 검거 과정 중 김승일은 독약캡슐을 먹고 자결하고 김현희만 산다. 한국 정부는 바레인에 수사팀을 보내 김현희의 신병을 확보해 12월 15일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했다.
김현희의 송환에는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수사관들에 의해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그의 입에는 자살 방지를 위한 재갈이 물려 있었다. 16년 만에 부활된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수사 발표에 따르면 이들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사고기에 탑승해 라디오와 술로 위장한 고성능 폭탄을 좌석 선반 위에 남겨놓고,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다. 이후 요르단을 거쳐 로마로 가려다 바레인에서 검거됐다.
88년 1월 15일 안기부의 수사 발표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현희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88올림픽을 방해하고 남한 내 계급투쟁을 촉발할 목적으로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했다"고 주장했다.
사건 발생 3년 만인 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김현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김현희는 판결 보름 만인 4월 12일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김현희는 이후 97년 안기부 직원과 결혼해 가정을 꾸려 삶을 이어가고 있다.
KAL858기 사건 유가족들은 34년째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올해 10월 31일 유족들은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사건의 진상 규명을 신청하며 "안기부가 개입했거나 사전에 인지했는지, KAL858기가 폭탄에 의해 폭파됐는지,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사건이 활용됐는지, 유가족들이 공안기관에 의한 감시 등 인권침해를 당했는지, 김현희가 정말 북한 공작원인지 등 의혹에 답해달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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