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첫 승차 유령 체험과 귀신들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경고: 노약자 및 임산부 주의>
"오후부터 유독 막힌다. 집 바로 앞에서 발이 묶이니 더 화가 난다. 다 귀신 때문이다."
교통 정체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일상. 그런데 10월 말부터 그 정도가 도를 넘었다는 지역이 있다. 북부자카르타 클라파가딩의 인도네시아몰(Mall of Indonesia·MOI) 주변이다. 아무리 귀신들이 사람 주변에 같이 산다고 여전히 믿는 나라라지만 이유마저 기이하다. "지하주차장에 귀신들이 바글바글하다"는 것이다. 솔깃했다.
알고 보니 진짜 귀신은 아니었다. 핼러윈을 겨냥한 공포 체험 행사였다. 이름하여 '카사블랑카 터널(Terowongan Casablanka)', 인도네시아의 첫 '승차 체험(드라이브 스루) 유령의 집'이라는 홍보 문구가 달렸다. 미국·일본 사례를 본뜬 듯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구매, 민원, 콘서트, 예배, 진료 등으로 다양해지는 드라이브 스루에 공포까지 추가된 셈이다.
한 달간(10.22~11.21) 진행된 행사에 직접 가 봤다. 인도네시아 귀신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배동선(58) 작가가 동행했다. 공포 영화가 매년 줄줄이 흥행 순위 상단을 차지하는 나라, 귀신 흉내를 내다가 경찰서에 끌려가거나 귀신 분장을 마스코트처럼 활용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이 땅에서 승차 공포 체험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현지 매체는 'MOI(모이) 지하의 테러'라고 표현했다. 인근 주민들의 고충도 새삼 이해됐다.
대기 90분, 체험 7분, 진짜 공포는…
인터넷만 가능한 예약(1인당 5만 루피아·약 4,000원)은 일주일치가 매진이었다. 평일이라 안심했다가 일정을 그만큼 미뤄야 했다. 유령의 집이 있는 지하주차장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MOI 곳곳에 설치된 이정표는 거의 무용지물, 10분 넘게 물어 물어 차량 대기 행렬에 도착했다.
평일 오후 3시쯤인데도 줄을 선 차량은 어림잡아 50대가 넘어 보였다. 표를 검사하던 직원은 "밤 9시까지 매일 6시간(주말 7시간)씩 운영되고 평일엔 1,000명, 주말엔 2,000명 넘게 온다"고 말했다. 차가 없는 이들을 위해 셔틀 차량도 마련했단다.
직원이 알려 준 라디오 FM 주파수를 맞추자 괴성과 비명, 음산한 배경음이 차 안을 짓눌렀다. "제발 끈을 풀어 달라"(이유는 뒤에 설명)는 인도네시아 대표 귀신 포총(pocong·실제 발음은 '뽀쫑'에 가깝다)의 절규가 반복됐다. 지하주차장 곳곳에는 귀신을 그린 벽화와 소품이 눈길을 끌었다. QR코드를 찍자 유령의 집 명칭에 얽힌 소개가 흘러나왔다.
'카사블랑카 터널' 괴담은 여러 버전으로 자카르타 시민 사이에서 회자된다. 실제 터널은 남부자카르타의 롯데쇼핑애비뉴에서 카사블랑카몰로 가는 길에 있는 지하도로를 가리킨다. 일대가 개발 전 거대한 묘지였던 터라 귀신 목격담이 끊이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나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붉은(merah) 귀신(hantu), '한투 메라'가 대표적이다. 귀신들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운전자들은 터널 진입 전 경적을 세 번 울려야 한다는 속설도 있다. 드라이브 스루에 걸맞게 차량과 관련된 유명 괴담을 차용한 셈이다.
차량에 갇힌 지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유령의 집 '카사블랑카 터널' 입구에 닿았다. 차량은 대략 1분 단위로 들어갔다. 안내요원은 몇 가지 주의사항과 함께 속설처럼 "경적을 세 번 울리고 입장하라"고 당부했다. 차가 검은 장막을 밀고 들어서자 차량 전조등 불빛만 희미한 어둠 속에 파묻혔다.
갑자기 차문이 벌컥 열리더니 머리를 산발한 피투성이 귀신이 비명을 질렀다. 차 뒤에 들러붙은 귀신이 후방거울 안에서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귀신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랐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에 벌이는 일종의 기습 공격이었다.
검은 장막으로 가린 다음 구역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공포 분위기를 키웠다. 7개 구역을 차가 서서히 지나갈 때마다 등장하는 귀신만 다를 뿐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초반 공포는 갈수록 무뎌졌다. 대미는 인도네시아인들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포총이 장식했다. 공포 체험은 약 7분 만에 끝났다.
"너무 무서워서 중간에 운전을 친구에게 맡겼다", "등장하는 귀신이 모두 인도네시아 귀신이라 더 떨렸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귀신 때문에 몸이 얼어붙었다" 등 체험 후기가 잇따랐다. 공포 영화를 싫어하고 겁이 많은 편에 속한다면 그럴 만하다.
정작 배 작가는 "실제 접촉이 없어서인지 기대 이상의 공포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지루해진 17세 이상 성인을 위한 실감 놀이'라는 업체 측 설명 정도가 적절해 보였다. 오히려 진짜 공포는 지하의 차량 안에서 90분이나 갇혀야 했던 색다른 기다림이 선사했다. 차량의 줄은 더 길어져 있었다. 이러니 주변 교통이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귀신 종류만 수천 개", 정치적으로 악용도...
인도네시아는 귀신 대국이다. 현지에서도 전문가로 손꼽히는 배 작가는 "전국구 귀신과 지역구 귀신을 합하면 수천 개는 된다"고 말했다. 어둠 속이라 명확히 분간은 되지 않았지만 드라이브 스루 유령의 집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대부분 전국구로 추정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 포총이다. 장례 풍습과 시신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끈 8개를 이용해 속옷을 입힌 시신을 하얀 천으로 감싼다. 끈 하나로 속옷을, 나머지 끈 7개로 머리 위부터 다리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천에 덮인 몸을 묶는다. 땅에 묻기 전에 반드시 모든 끈을 풀어 준다. 포총은 끈이 묶인 채로 매장된 시신이 변한 귀신이다. 그래서 "끈을 풀어 달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눈이 텅 빈 녹색(또는 흰색) 얼굴이 공포를 더한다.
쿤틸아낙(kuntilanak)은 우리나라 처녀귀신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다만 쿤틸아낙은 임신이나 출산 중에 죽은 여성으로 묘사된다. 큰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떠돌아다닌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재스민꽃 향기가 나면 쿤틸아낙이 지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원래 칼리만탄(보르네오)섬의 지역 귀신이었으나 아기를 낳다 죽은 여성들의 사연이 일반적이라 전국구로 승격됐다. 서부칼리만탄주(州)의 주도인 폰티아낙의 지명도 쿤틸아낙에서 비롯됐다.
웨웨 곰벨(wewe gombel)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의 외도와 학대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중부 자바 여성의 영혼이다. 아이들을 납치하는 귀신으로 알려졌다. 다만 학대당하는 아이만 데려갔다가 부모가 반성하면 되돌려 준다는 얘기도 전한다.
자바 출신 투율(tuyul)은 아이나 소인 모습의 대머리 유령이다. 다른 사람의 돈을 훔쳐다가 주인을 부자로 만든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담보로 키우기도 한단다. 계약이 깨지면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게 된다.
발리에 갔다면 한 번쯤 봤을 레악(leak)은 원래 자바 귀신이다. 힌두교를 신봉하던 자바섬의 마자파힛 왕국이 1478년 붕괴된 후 힌두교도들이 발리로 넘어가면서 함께 따라갔다. 현재는 발리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큰 눈과 거대한 송곳니, 긴 혓바닥이 튀어나온 크고 털이 많은 흉측한 유령이지만 낮에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털북숭이 거대 괴물인 색마 근드루워(Genderuwo)도 있다.
인도네시아의 귀신은 개인적 원한보다 집단적 트라우마로 탄생한 경우가 많다. 쿤틸아낙, 웨웨 곰벨처럼 가부장제와 여성 차별 문화도 스며 있다. 1965년 대학살 당시 민간인 집단 매장지에 사람들이 접근하거나 발굴하지 못하도록 귀신 그림을 그려 놓는 등 귀신은 정치적으로도 악용됐다. 배 작가는 "귀신의 존재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문화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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