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20조 투자로 뚜렷해진 공급망 재편
반도체 안보 블럭 ‘바이든 쿼드’ 구체화
中 반도체 굴기는 지연, 중국 추격 제한
편집자주
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삼성전자가 결국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짓기로 했다. 삼성으로선 메모리에 이은 비메모리 세계 1위를 향한 행보다. 그러나 백악관의 환영 성명은 반도체가 안보 사안으로 다뤄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성명에서 “공급망 보호는 바이든 대통령과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라며 “한미 정상회담을 포함한 양국의 지속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했다.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한국이 가세한 성과란 의미다.
미국에 글로벌 안보는 군사에서 경제 문제로 전환돼 있다. 경제가 안보 프레임으로 해석되고 경제 효율과 무관한 안보 논리로 대응책이 마련된다. 시장논리에 따른 기술 전이가 국가 안보에 치명적 부메랑을 가져오는 사실을 중국에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부터 군사 문제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미중의 첨단 기술전쟁에서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반도체와 5세대(5G) 기술이다. 그런데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전체주의 중국의 도전과 미국’에서 미중 5G 전쟁은 국방부가 주도했다고 소개했다.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반도체 문제를 이슈화시킨 주인공 역시 국방부였다.
기술전쟁에서 미국의 다급함은 대응하는 모습에서 역력하다. 기존 통신보다 10배 이상 빠른 5G는 산업 경쟁력의 결정적 변수다. 5G 서비스가 시작된 2019년 당혹해 하던 미국의 처지는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대사 발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5G가 국가안보 문제이고 사이버 보안은 동맹국 통신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요소”라며 한국에 화웨이와의 거래중단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 화웨이는 독보적 기술을 확보한 상태였다. 미국은 이후 3년 동안 전방위로 압력과 제재로 이른바 화웨이 냉전, 화웨이 참수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시간을 번 미국은 지금 6G 개발로 치고 나가고 있다. 더는 미국이 한국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것도 5G 경쟁의 틀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반도체는 산업과 국방의 필수 원자재로, 4차 기술혁명에서 상대방 목을 조르는 ‘초크 포인트’로 불린다. 2018년 미중 반도체 전쟁 당시 트럼프 정부는 반도체 기술이 10% 넘게 들어간 물품의 금수조치부터 시작했다. 바이든 정부에선 공급망 재편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6월 발표한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보고서는 미국 내 일관생산 체제의 구축을 목표로 제시했다.
반도체 경쟁에서 미국의 급박한 모습은 올해 삼성전자가 네 차례 백악관 회의에 참석한 데서 알 수 있다. 한미 관계보다 삼성과 백악관의 관계가 더 좋아 보일 정도다. 지난 4월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처음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을 초청한 회의에서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 세계 3대 반도체 기업들에 미국 내 공장 신설을 촉구했다. 자국 중심의 글로벌공급사슬(GVC) 구축을 위해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고, 결과적으로 대중국 반도체 연합전선도 만들려 한 것이다. 이에 인텔은 애리조나에 200억 달러를 투자하는 차세대 파운드리 공장 2곳을 착공했다. 대만의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TSMC도 120억 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에 생산라인을 설치하기로 했다.
안정적 공급망이란 점에서 상징성이 큰 이번 삼성전자의 170억 달러 투자에 대해 미국 정부의 압박을 거론한 곳은 뉴욕타임스다. 한국과 미국을 놓고 고민하다 텍사스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시계를 6개월 전으로 되돌리면 상황은 보다 확연하다. 5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에선 미국이 반도체 투자를 압박할 것이란 예상이 위기론으로 증폭됐다. 미국 압박 속에 한국산 반도체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중국과 거래가 끊길 경우 벌어질 사태에 대한 공포였다. 중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40~50%를 수입해 가는 최대 반도체 시장이다. 백악관이 기업들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이유는 미국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12%에 불과한 현실이 큰 이유다. 2020년 4,5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시장은 대부분 대만과 한국, 중국의 차지였다. 미국은 1990년대 반도체 시장의 37%까지 담당했지만 정책 실패까지 겹쳐 기업과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는 한국 대만 일본 인도가 가세해 있다. 이른바 글로벌 반도체 안보 블럭인 ‘바이든 쿼드’다. 미중 기술패권 전쟁에서 기업 차원이긴 하나 미국과 동맹을 맺게 된 것이다. 기업들로선 원천기술을 다수 확보한 미국의 구심력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현실도 있다. 기업들의 기능적 참여에 중국이 반발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미국 견제가 강해지면서 중국은 반도체 기술 확보에서 아직은 고전하고 있다. 중국은 마이크론, 샌디스의 인수의 무산으로 기술도입을 통한 반도체 육성이 좌절되자 자력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반도체 굴기의 상징이던 칭화유니그룹의 파산신청에서 보듯 성과는 썩 좋지 않은 단계다. 반도체 자급률도 2010년 10.2%이던 것이 작년 15.9%로 소폭 늘어났으나 이마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 등을 뺀 자국기업 비중은 5.9%에 불과했다. 중국제조 2025의 목표치(40%)가 절반 이하로 수정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반도체 공급망 조정이 화웨이 사태와 유사한 양상인 점이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 뒤 삼성전자 등의 세계 5G 장비시장 점유율은 상승했다. 화웨이 냉전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반도체 전쟁에서도 삼성전자과 SK하이닉스는 미국이 핵심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으면서 메모리 분야에서 한동안 중국 추격을 따돌릴 수 있게 됐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 국면에서 삼성전자 인텔 TSMC의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것도 중국을 어렵게 할 요인이다.
당장은 미국이 반도체 패권을 위해 삼성전자 힘을 빌리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반도체 자립 전략에 삼성을 포함할지는 알 수 없다. 인텔 등 자국기업 중심으로 반도체 독립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의 경우 반도체 주권을 되찾겠다는 의욕을 숨기지 않고 있다. 상원에서 6월 통과된 반도체생산 촉진법은 핵심기업들에 520억 달러 지원을 정했으나 해외기업 배제 논란으로 아직 하원에 계류 중인 사실도 기술민족주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어려운 현실과 냉혹한 경쟁은 어느 쪽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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