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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짜리 연극, 뒤엉킨 편견을 걷어내는 찰나의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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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짜리 연극, 뒤엉킨 편견을 걷어내는 찰나의 순간처럼

입력
2021.12.06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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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
26일까지 공연… 2부는 내년 2월부터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서 서로 다른 공간에 속한 두 쌍의 배우가 한 무대에 동시에 등장해 각기 다른 갈등을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서 서로 다른 공간에 속한 두 쌍의 배우가 한 무대에 동시에 등장해 각기 다른 갈등을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국립극단 제공

1985년 미국 뉴욕 한 유대인 여인의 장례식. 추모사를 하던 랍비가 "저는 이분을 모르지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지난달 26일 국내 초연으로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국립극단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첫 장면에 나온 이 대사는, 이 연극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20세기 중반, 미국 이주자, 유대인, 여성. 망자를 규정하는 단어들로 그 인생을 알 수 있겠지만 편견으로 가득 찬 속단일 수도 있다. 연극은 관객이 이런 장벽을 직시하게끔 이끈다.

퓰리처상과 토니상 등을 휩쓴 작가 토니 쿠슈너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91년 초연된 후 30여 년간 연극은 물론 영화와 오페라로도 변신하며 감동을 전했다. 보수주의와 동성애·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혐오가 확산하던 1980년대 미국 사회에 사는 각기 다른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안의 장벽을 풀어낸다. 에이즈에 걸린 전 드래그퀸 프라이어와 그의 동성 연인 루이스, 몰몬교도 부부인 조와 하퍼, 극우 보수주의자인 변호사 로이 등의 세 이야기가 얽혀 진행되는 극이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서 성공한 변호사인 로이(맨 오른쪽)가 미국 연방 제2항소법원 수석 서기관인 조(왼쪽)에게 중앙정부로의 이동을 설득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서 성공한 변호사인 로이(맨 오른쪽)가 미국 연방 제2항소법원 수석 서기관인 조(왼쪽)에게 중앙정부로의 이동을 설득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무려 8시간에 달하는 공연 시간이 화제였다. 신유청(40) 연출은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관객들이 공연 시간을 납득할 수 있도록 "한 문장 한 문장, 순간 순간을 잊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이란 프레임으로 극에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부분들을 버리고자 애썼다. 극 전반에 깔린 기독교와 유대교, 종교적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되 보편적 메세지를 전하는 데 집중했다는 의미다. 신 연출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치, 인종, 학벌, 지역 등에 대한 편견에 한 번에 맞설 수 있는 작품"이라며 "우리 안의 장벽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36년 전 배경의 연극이지만, 전례 없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속에 아시아인 혐오 등 우리 안의 장벽이 높아지는 경험을 한 현재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8시간이 우리 안의 동성애·정치·인종·종교 등 다층적 편견과 차별을 무대로 끄집어내고 깨부수는 데 걸린 시간이라면, 오히려 찰나의 순간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의 연출 신유청.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의 연출 신유청. 국립극단 제공

관객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도 뒀다. 우선 물리적으로 공연 시간을 반으로 나눴다. 올해는 1부 격인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를 공연한 후 내년 2월 '파트 투: 페레스트로이카(러시아어로 '개혁'을 의미)'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신 연출은 "1부에서 폭발하듯 각 인물의 이야기를 펼쳤다면, 2부는 장벽을 부수는 과정으로 연극 전체의 명확한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장치로 회전 무대를 설치해 보다 다양한 공간을 구현함으로써 지루함을 덜어냈다. 그러면서도 다른 두 공간을 밀도 있게 연결하며 호흡을 이어간 연출이 돋보인다. 각각 병실과 거실에 있는 프라이어와 루이스, 조와 하퍼를 한 무대에 세워 서로의 대사와 동선이 연결되는 듯 엇갈리며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은 특히 관객을 압도한다.

이 작품은 배우 정경호(프라이어 역)의 첫 연극 데뷔로 주목받기도 했다. 그의 대학 2년 선배인 신 연출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있고, 어떤 시각으로 보든지 다양성을 가진 배우가 필요했다"며 캐스팅 이유를 설명했다. 또 "배우의 장르 구분이 비교적 선명한 우리 사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이 작품의 메시지와도 통한다"고 덧붙였다. 공연은 오는 26일까지.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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