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잔나비 등 젊은 가수들 LP판 인기
국내 유일 LP 공장은 2교대로 숨가쁜 나날
회현 지하상가·LP바 부쩍 증가한 젊은 손님들
MZ세대 "음악을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매력"
턴테이블 위 LP판처럼 환풍구가 그칠 새 없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공장 거리 중에서도 여느 때보다 분주한 곳이 있다. 바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LP 생산하는 마장뮤직앤픽처스 공장이다.
유니폼을 챙겨 입은 예닐곱의 직원들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바빠졌다고 한다. 생산 라인에서 바삐 LP를 만들어주면, 포장을 하고 운송 차량으로 싣는다. 재고가 쌓일 틈도 없이 출고되는 것이다. 외근 2030을 중심으로 젊은세대 사이에 LP 열풍으로 마장뮤직앤픽처스는 표정 관리 중이다. 2017년에 런칭한 이 LP 제작사는 국내 LP 주문량을 거의 담당하고 있다.
국내 유일 LP 공장, "2교대로 숨 돌릴 틈도 없어"
마장뮤직앤픽처스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 LP 주문·제작 문의는 지난해 대비 2.5배 이상 증가했고, 내년도 주문은 올해 대비 2배 가량 늘어 매년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오래된 음반뿐만 아니라 2030이 선호하는 아티스트의 새 음반 LP 주문 문의가 많이 들어와, 젊은 세대 사이에 LP가 큰 호응을 얻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고.
왜 갑자기 LP일까.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한 '뉴트로'의 인기가 한 몫 했다는 게 회사 측 관계자의 설명이다. 여러 분야에서 옛 것을 다시 찾아 즐기는 분위기가 만들어 지면서 아날로그 음악 매체인 LP를 향한 관심도 커졌다는 것. 거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속에서 실내에서 즐기는 취미생활 거리를 찾는 이들이 늘고, LP도 그 바람을 탔다는 것이다. 특히 디지털에 익숙한 2030 세대에게 LP는 수고를 들여 음악을 재생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 지점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그저 스마트폰 터치가 아닌 책장에서 꺼내 턴테이블 위에서 재생시키는 방법이 음악을 더 존중하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LP 마니아의 성지 회현역 지하상가에도 따뜻한 바람
몇 년 새 달라진 LP 시장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는 건 회현역 지하상가 LP 상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60년 이상 3대 째 LP 가게를 운영 중인 리빙사에 찾아가 봤다. 기자와 만난 리빙사 이석현 대표(52)는 최근 변한 상가 분위기를 전했다. "예전에만 해도 4050이 많이 찾았는데 요즘에는 2030 손님이 많아요. LP 공장이 하나 둘 없어지던 때를 떠올리면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죠."
아버지로부터 LP 가게를 이어받아 20년 동안 지켜온 이씨는 이제 20대 딸과 함께 꾸려가고 있다. "젊은 손님들이 '음원은 2D인데, LP는 3D같다'고 하더라고요. 마찰음에 의해 소리를 내는 LP만의 아날로그 느낌이 디지털 세대에겐 신기하게 다가가는 것 같네요."
딸 이모(26)씨 역시 MZ 세대 사이 LP의 인기를 체감한다고 했다. 그는 LP시장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스타트업 회사를 그만뒀다고 전했다. 최근엔 아버지 곁에서 가게를 물려받을 준비에 한창이다. "우리 세대에는 노래 한 곡을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그런 결핍을 LP가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요. 예쁜 자켓으로 덮여진 노래를 사는 게 좋다는 친구들도 많고요."
회현역 지하상가를 찾은 유민승(26)씨는 LP판에 한 달에 20만원 정도를 쓴다고 밝혔다. LP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우연히 Adele의 노래가 LP로 재생되던 순간에 매료돼 수집을 시작했다는 것. "그 때는 턴테이블도 없었는데 소리가 너무 좋아 LP를 무작정 샀어요. 그러다 보니 턴테이블도 사고, 이제는 백예린 등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LP 신보가 나오면 소장하려고 삽니다."
유씨는 바로 이 소장할 수 있다는 점이 LP의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쉽게 듣는 건 사라지는데, 사놓으면 판을 만질 수도 있고, 물리적으로 가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LP 수집을 시작한 지 3년이 됐다는 유씨는 이렇게 가끔씩 회현역에 들러, 음악을 만져보고 골라 집으로 들고 간다. 이렇게 회현역의 유명세를 듣고 찾아오는 LP 유입층, 젊은 세대들이 많다고.
LP로 자신의 공간 채우는 MZ세대
LP의 인기에 힘입어 혼자 수집하고 즐기는 젊은 층도 늘었다. 4년 전부터 턴테이블을 구매해 LP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윤해솔(29)씨는 '디지털에 대한 반감'을 LP 수집 이유로 들었다. "어떤 음반을 살까, 직접 살까 고민하고 조심히 다루면서 열고 꽂고, 스크래치 안 생기게 관리 잘해야 하고 그런 게 불편해요. 그런데 그 불편함이 소중함으로 연결돼서 정말 좋아요."
윤씨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더 많이 LP판을 소비하게 됐다고 밝혔다. 턴테이블도 좋은 것으로 바꾸고, 하나둘씩 모으다보니 현재는 소장하고 있는 LP판이 30~40장에 달한다고. 이제는 마치 책을 꽂아두듯 좋아하는 앨범을 모아둔다. "예전에 LP바에 가면 주르륵 꽂아져 있는 게 멋있어 보였는데, 천천히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카페를 운영 중인 류새힘(31)씨 역시 불편함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이유로 꼽았다. "사실 저는 MP3 세대예요. 그 당시에는 듣고싶은 노래를 하나씩 골라 음원을 MP3에 다운받아서 들었잖아요. 그런데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노래를 듣거나 별로인 것 같으면 1분도 안 되어 넘겨버리는 식으로 소비하는 게 싫었어요."
음악을 하나씩 골라 넣어두던 MP3의 향수를 LP판 수집으로 찾고 있는 셈이다. 좋아하는 앨범의 커버 사진을 실물로 커다랗게 두고 보니, 확실히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류씨는 최근에는 20대들이 선호하는 가수의 LP판은 구하기 어렵다고도 전했다. "시티팝 장르나 이문세, 신승훈, 빛과 소금, 김현철 등 유명한 가수들 LP판은 20대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요즘은 도통 구하기 어렵더라구요."
하나둘 모은 LP판은 어느새 가게 한 켠을 가득 채울 정도로 450장 정도가 쌓였다. 중고 LP를 살 때에는 직접 가서 고르고, 새로 나오는 LP는 온라인으로도 주문한다. "이렇게 사면 안 되는데, 사다보니 버는 것보다 더 쓸 때도 있어요. 하지만 턴테이블이 LP판을 긁을 때 듣기 싫은 지지직 소리가 아니라 음악 소리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고 매력적이라 자꾸 사게 되네요."
이러한 MZ세대 인기에 힘입어 최근 음반을 발매하는 가수들 사이에서도 LP판을 제작하는 경우가 늘었다. 마장뮤직앤픽쳐스 관계자는 잔나비, 백예린, 블랙핑크, 태연 등 젊은 가수들이 LP판을 발매해 팬들이 소장하는 굿즈(Goods·특정 브랜드나 연예인 등이 출시하는 기획 상품)로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들의 수요에 맞춰 감각적인 디자인을 내놓는 데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젊어진 LP바··· 힙한 감성 혹은 추억의 장소 찾는 2030
LP에 취미를 붙인 젊은 층은 서울 곳곳의 LP바로도 걸음을 한다. 서울 이태원 해방촌에 위치한 LP바 겸 판매점 서울바이닐은 LP를 알 만한 사람들은 들르는 곳이다. 이 곳은 신청곡을 적극적으로 틀어주지는 않지만, 사장님 특유의 감성 덕에 소위 '힙하다(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는 뜻의 신조어)'는 평을 듣는다.
이 LP샵을 찾은 단골 고객 신모(25)씨와 강모(25)씨는 "친구 추천으로 왔었는데, 노래가 너무 취향이었다. 사장님의 취향 때문에 자주 온다"고 밝히기도 했다. 주로 젊은 고객들이 찾는만큼, 위캔드·퀸·마이클잭슨 등 2030 세대에게 잘 알려진 아티스트들의 LP판이 인기가 많다.
신청곡만을 주로 틀어주는 LP바들도 인기다. 합정역 부근에 위치한 LP바 블루먼데이는 영업 기간만 14년이 된 곳이다. 긴 시간만큼 쌓아온 소장 LP판이 13,000장에 달한다. 이 중에는 손님들이 직접 구매해 가져다 놓는 경우도 있다.
블루먼데이 대표는 최근 대부분이 2030 젊은 손님이라며, "코로나19가 점점 걷히면서 가게도 점차 살아나는 분위기"라고 운을 뗐다. 그에 따라 신청곡도 올드팝보다는 젊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높은 LP 소장률만큼 LP로 못 트는 곡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처음 대학로에 문을 열었던 14년 전, 9년간의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그저 LP가 좋아 시작했던 LP바. 디지털 시장에 밀리고 코로나19의 풍파를 겪는 동안 가게를 닫을 위기가 많았지만, 이렇게 버텨왔던 건 순전히 LP에 대한 애정때문이라고.
이 곳의 주말 저녁은 2030 젊은 손님들이 가득 채웠다. 박모(26)씨는 LP바의 매력을 '신청곡'에서 뽑았다. "제가 신청한 노래가 나오면 선택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 또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들으니까 같이 온 사람이 좋아하면 친밀감도 들고요." 신청한 노래를 턴테이블의 마찰음과 함께 듣는 것이 MZ세대에게는 신기하게 다가오는 셈이다.
합정에서 발걸음을 조금 옮겨 신촌 대학가로 옮기면, 31년째 운영 중인 LP바 비틀즈가 있다. 켜켜이 꽂힌 LP판들은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것이 많다. 비틀즈의 대표는 젊은 시절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다, 이 곳에 LP바를 열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음반 산업도 펼쳤으나 풍파를 겪고 현재 이 LP바만 남겨둔 상태다.
올드팝을 주로 트는 만큼 최근 젊은층이 주로 찾는 힙한 감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테이블 유리 밑을 가득 채운 명함들, 선반 위 단골 손님들의 이름이 쓰여진 술병들은 이 곳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청춘들을 달래왔던 곳인지 실감케 한다. 이 곳에는 최근 젊은 층 인기에 힘입어 오래된 노래를 좋아하는 젊은 단골 고객들도 늘었다.
"젊은층 LP 인기 늘수록 다양성 축소는 우려"
다만 회현역 지하상가 리빙사 대표 이석현씨에 따르면 이러한 LP 열풍이 달갑지 않은 측면도 있다. 젊은 세대 사이 LP의 인기가 지속되자, 현대카드가 2015년 뮤직 라이브러리를 개장한 것.
현대카드는 초기 뮤직 라이브러리를 준비할 때 이 곳 회현역 지하상가 LP 상점들에 조언을 구했다. 뉴트로 열풍이 불기 이전부터 장사가 안 될 때도 굶으며 지키고, 팔리지 않는 옛 LP판도 불문하고 판매해온 국내 LP 시장의 성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뮤직 라이브러리가 개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다양한 LP판들이 있던 회현역 상가에서 LP판들을 구해갔지만, 젊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라이브러리로 몰리면서 이 곳의 매출은 급격히 줄었다. "뮤직 라이브러리가 젊은 고객들에게 볼거리를 만들어주는 건 좋지만, 우리가 지켜온 LP 시장의 다양성이 소실될까 걱정도 되는 게 사실이에요. 그 쪽으로만 사람이 몰리고 특정 음반만 취급하다 보면요."
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하던 40년 전부터 가게를 찾던 단골 손님을 맞고 있는 이씨가 최근 젊은 세대 사이 LP의 인기가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기를 바라는 이유다. "나이 먹은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음악을 많이 듣는 세상이면 좋겠어요. 그저 음악을 들으면 좋으니 이어온 업이고, 다른 사람들도 들으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기자는 LP 상점들과 LP바들을 취재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뉴트로 열풍으로 LP가 젊은 층에서 각광받기 이전, 음악에 대한 애정 하나로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LP의 부활은 LP를 지켜온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새로운 것에서 옛 것으로 옮겨가는 유행의 기류치고는 꽤 서글픈 이면들이 엿보였다.
2030 세대 사이 LP의 소비는 겪어본 적 없는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였다. 뮤직 스트리밍 서비스 월간 Top 100을 듣고, 매력적이지 않은 도입부는 1분도 안 되어 넘겨버리는 것이 익숙한 세대. 이들에게 만질 수 없는 음악을 만질 수 있게, 손 밖을 떠다니는 음악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경험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LP의 부활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 다시 묻는 것 아닐까. 어느 시인의 구절이 떠오른다. 자세히 들어야 예쁘다. 오래 들어야 사랑스럽다. 음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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