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라는 말이 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일로, 외국어 ‘웰빙(Well-being)’을 대체하는 우리말이다. ‘웰빙’은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행복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웰빙즙, 웰빙밥, 웰빙빵 등 건강한 먹거리를 강조하는 데 쓰였다. 이처럼 들어온 말은 모국어와 ‘같아 보이지만 같지 않은’ 관계에 있다. 편해 보일지라도 맞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stainless) 그릇을 스텐 그릇이라 부르면 녹이 잘 스는 그릇이 되어 버린다. 꽃집을 ‘플라워’로, 미장원은 ‘헤어’로 부르면 편할 수는 있어도 같은 말은 아니다. 한글로 적은 영어 간판은 관객을 잊은 배우처럼 서 있다. 새 빵집을 열면서 단 간판이 ‘브레드하우스’이다. 아는 외국어를 떠올려 보아도 결국은 ‘빵집’인데, 빵을 팔면서 ‘빵집’이라 쓰지 못한 사연이 궁금하다. 아파트 광고로 보이는 ‘빌리브 프리미어’에서는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구름을 잡는 듯하다.
진짜 심각한 말은 정체가 불분명한 혼합형이다. 생태계를 깨는 외래 어종처럼 슬며시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말의 생태계를 뒤흔든다. 사회적 차원에서 한국말을 챙기지 못한 어느 때, 외국어가 만능열쇠 같은 ‘하다’를 달고서 생활 속에 들어왔다. ‘파이팅하다, 스터디하다’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2021년에 비슷한 과정으로 ‘스터디카페, 킥오프회의’ 등이 틈을 비집는다. 킥오프(kickoff)란 축구 시합이 시작될 때 공을 중앙선의 가운데에 놓고 차는 것이다. 그 행위와 회의를 연결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의 정서에서 시작된 말은 아니다.
새말이 필요해서 그냥 썼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처음부터 안 쓸 수도 있었다. 곳곳에 뿌려진 정체불명의 말을 따르다 보면 나중에는 적당한 우리말을 떠올리지 못한다. 아연에 이름을 붙인 화학자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오직 용량이 약과 독을 구분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어떤 외국어는 우리 생활의 일부를 채워주는 약이 되겠지만 일정 부분 이상을 넘어서면 독이 된다. 옷 한 벌 마련할 때도 좋은 옷감을 택하고, 옷매무새를 생각하며 뒤트임도 주고 꽃수도 놓는다. 그런 옷에는 아무것이나 덧대 깁지 않는다. 임시방편으로 아무것이나 가져와 덧댄 옷을 두고 우리는 누더기라 한다. 모국어를 누더기로 만드는 바늘 한 땀, 오늘 내가 뜨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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