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16일
국내 피해자로 첫 고백, 이후 위안부 증언 이어져
김 할머니 첫 증언 8월 14일 '기림의 날' 지정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나를 17세 때로 돌아가게 해주오. 당신네 일본 사람들이 나의 청춘을 망쳐놓았소.
고 김학순 할머니
1997년 12월 16일 새벽 1시 40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밝힌 고 김학순 할머니가 별세했다. 파란 많은 삶을 마친 김학순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일본의 기만적인 국민기금을 절대 받지 말 것과 일본의 국가 차원 사과를 꼭 받아내 달라"였다.
당시 김학순 할머니는 서울 노원구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정부보조금만으로 어렵게 생활했다. 병세가 악화되자 다니던 동대문감리교회에 "나보다 더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1천7백만 원이 든 통장 등 전 재산 2천만 원을 기탁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서울 중구 정동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신대 문제협회의에 찾아와 자신의 한 맺힌 삶을 공개했다. 할머니는 설움에 복받친 눈물을 흘리면서 "정신대의 산 증인으로 당당하게 일본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나왔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신대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이라고 몸서리친 할머니는 '일본이 정신대의 존재를 부인하는 등 책임회피를 계속하면 증인으로 나서 재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한국 피해자를 비롯해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호주와 네덜란드의 피해자도 앞으로 나서게 됐다. 그 결과 1993년 8월 4일 일본군 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강제성 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이끌어 냈다. 일본군 위안부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는 2012년 김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한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해 활동을 펼쳤다. 2017년에는 정부가 민간에서 진행돼 오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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